스캔들 세계사

독일 바인스베르크

만일 여러분이 전쟁 상황에서 성 안에 고립되어 있다면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밖에는 적군이 바글바글하고 안에는 식량이 없어 굶주릴 때, 딱 하나만 등에 짊어지고 나갈 수 있다면? 여러분이 지금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글 _ 이주은(《스캔들 세계사》의 저자)

딱 한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면




여러분은 종종 심리테스트에서 ‘무인도에 갈 때 한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면?’ 또는 ‘집에 불이 나면 뭘 갖고 나올 것인지’ 등의 질문을 접해보셨을 텐데요. 보통은 상상 속의 이야기이지만, 12세기 독일 바인스베르크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답니다.




인정할 수 없던 패배

때는 1127년 독일 바인스베르크, 독일의 왕이었던 ‘로타르 2세(로타르)’는 자신의 딸과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를 결혼시켰습니다. 공주와 결혼도 했겠다, 하인리히는 독일 왕 자리를 노리게 되었죠. 10년 뒤인 1137년 로타르가 세상을 떠나자 하인리히는 왕위에 앉으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은 간선 제도를 통해 왕을 선출했고, 하인리히는 돈과 인맥을 동원했지만 결국 ‘콘라트 3세(콘라트)’에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자고로 패배란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법, 하지만 하인리히는 인정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콘라트는 하인리히와 5년에 걸친 내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하인리히는 세상을 떠났고 하인리히의 형제인 ‘벨프 6세(벨프)’ 공작이 콘라트와 전쟁을 이어갔습니다.
 

내 아내의 발을 밟다니!

물론 하인리히와 그의 형제 벨프 공작이 왕위를 빼앗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벨프 공작이 콘라트의 아내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가 실수로 발을 밟아 전쟁이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하게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콘라트는 “네가 감히 내 아내의 발을 밟아!”라며 매우 화를 냈고, 처음에는 죄송하다고 굽신거렸던 벨프 공작도 참다못해 콘라트에게 쪼잔하다며 버럭 화를 내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분을 삭일 수 없었던 콘라트가 아내의 발을 밟은 벨프 공작의 성을 군대로 둘러싸면서 전쟁이 시작됐다고 하죠. 어찌 보면 사랑꾼 같지만 콘라트의 아내가 너무나 곤란했을 상황이었네요.

굶어 죽느냐 칼에 죽느냐
콘라트의 병사들은 벨프 공작의 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벨프 가의 사람들은 성 안에서 며칠을 꿋꿋이 버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식량을 몰래 들여오던 비밀 통로가 막히고 비축해 둔 물도 떨어지자 벨프 가의 사람들은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고민 끝에 이들은 콘라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죠. 여자와 아이들은 전쟁과 상관없으니 살려주고, 등에 짊어지고 갈 수 있을 만큼의 재산만 갖고 나갈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콘라트가 생각하기에도 무기를 들지 않은 민간인 여성과 아이를 죽이는 건 명예롭지 못한 일이었으니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를 허락합니다. 하지만 벨프 가의 제안이 사실은 하나의 묘책이었을 줄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죠.



가장 소중한 재산

다음 날 아침, 여자와 아이들이 성에서 나가기로 한 시간에 문이 열리자 콘라트의 병사들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가장 소중한 재산만 가지고 나가겠다고 약속했던 여자들의 등에는 세간살이나 금은보화가 아닌 그들의 남편, 아버지, 오빠, 남동생 등 남자들이 업혀 있었기 때문이죠. 병사들은 발끈해 무기를 꺼내 들었지만 콘라트는 껄껄 웃으며 ‘왕은 한번 한 약속은 지킨다’며 여자들의 등에 업힌 남자들을 모두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의로운 여인들의 행동에 화답한 것입니다. 이후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는데요. 그런 콘라트의 호탕한 태도에 감동 받은 벨프 공작이 콘라트에게 다시금 충성을 맹세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화에 따라 오늘날 벨프 공작의 성은 ‘바이버트로이’ 성으로 불립니다. 이는 ‘아내의 충의’라는 뜻이죠.

 


맥주의 나라로 알려진 독일이 알고 보면 와인 생산량 세계 10위, 소비량 세계 4위의 와인 대국이라는 사실, 아셨나요? 독일 남서부에 위치한 바인스베르크는 기후가 온화하고 연간 일조시간이 1천 600시간에 이를 만큼 일조량이 풍부해 중세부터 와인 명소로 유명한데요. 벨프 공작의 바이버트로이 성은 현재 폐허가 되었지만, 성을 둘러싼 포도원의 향기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입니다. 바인스베르크에 가신다면 수풀이 무성한 성터를 바라보며 한 잔의 와인을 음미해보세요. 그리고 포도밭에서 은은히 퍼지는 향을 맡아보세요. 그 옛날 벨프 가의 여인들이 성문을 나서며 맡았던 향기와 똑같답니다!


 

2022-09-01

이주은: 포털 사이트에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며 ‘동화보다 재미있는 세계사’로 주목받았다. 현재는 방문자 600만 명의 파워블로그와 ‘눈숑눈숑 역사탐방’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스캔들 세계사》 시리즈와 《개와 고양이에 관한 작은 세계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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