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 세계사

영국 런던

영국 런던에 위치한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에 가면 수많은 유물들 사이로 돼지 한 마리에 관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총과 군복, 눈물 젖은 편지 사이에 뜬금없이 등장한 돼지에 관람객들의 눈이 동그래지곤 하죠. 독일에서 태어난 이 돼지는 어쩌다 독일의 적국이었던 영국 전쟁 박물관의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걸까요? 지금부터 그 돈생역전기(逐生逆轉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글 _ 이주은(《스캔들 세계사》의 저자)

저녁밥에서

슈퍼스타가 된

돼지의 돈생역전기



칠레의 해안가에서

주인공 돼지의 이름은 바로 ‘티르피츠’입니다. 귀여운 이름과 함께 말랑말랑한 코를 씰룩거리던 티르피츠의 이야기는 세계가 포화 속에 잠겨있던 제1차 세계대전 때 시작되었습니다. 티르피츠는 전쟁 중 신선한 고기를 공급하기 위해 배에 오른 여러 가축 중 하나였죠. 티르피츠의 집은 독일의 ‘드레스덴호’였습니다. 1914년부터 1년 간 드레스덴호에서 지내던 티르피츠의 돈생에 큰 변화가 찾아온 건 1915년 3월 14일 아침이었죠. 
 

드레스덴호

 

3월 14일, 드레스덴호는 칠레 해안가에서 영국의 글래스고호와 마주쳤습니다. 이 둘이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는데요. 1914년 11월, 코로넬해에서 처음 전투를 벌인 이들은, 약 한 달 뒤 포클랜드 섬에서 다시 맞붙었습니다. 독일은 처참하게 패배했고 8척의 배 중에 석탄선 한 척과 드레스덴호를 제외한 모든 배가 침몰했습니다. 겨우 살아남았던 드레스덴호는 달아났지만, 3개월 뒤에 칠레 해안가에서 또 글래스고호를 마주쳐버렸죠. 드레스덴호는 또다시 궁지에 몰렸습니다. 영국군은 드레스덴호를 침몰시켜버렸고 독일군은 배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배에 있는 동물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침몰하는 배에 남아있던 티르피츠는 가까스로 탈출했고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영국 배를 향해 헤엄쳤습니다. 잠시 후 글래스고호의 한 선원이 수많은 잔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티르피츠를 발견해 글래스고호로 끌어올렸습니다.
 


 

전쟁 영웅 등장이오
갑자기 등장한 돼지의 등장이 흥미로웠던 글래스고호 군인들은 이 돼지에게 독일의 군인이자 정치가인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의 이름을 딴 티르피츠란 이름을 붙여주었죠. 그리곤 모두가 달아났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배를 지킨 티르피츠의 용맹함과 충성심을 칭송하기 위해 독일 훈장인 철십자를 수여하고 전쟁 영웅이라 불렀답니다. 모두 티르피츠를 마음에 들어 했고 그렇게 독일군의 식사가 될 뻔했던 돼지는 영국군의 마스코트가 되었죠. 이후 티르피츠는 영국군의 사랑을 듬뿍 받는 반려동물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글래스고호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귀빈 취급까지 받았는데요. 돼지 열병으로 인해 해외에서 돼지의 반입이 금지되었을 때도 글래스고호 선장은 티르피츠가 지난 1년간 다른 돼지와 접촉한 적이 없다고 보증하는 서류를 제출했고 티르피츠만이 영국에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가요? 영웅 대우를 받는 돼지답죠?

 

골칫거리를 해결하는 법
티르피츠는 1916년부터는 해군 훈련 시설에 소속되어 즐거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독일 전함을 탈출한 돼지로 워낙 유명해졌기에 처음에는 모두 티르피츠를 반겼죠. 그러나 얼마 뒤부터 점차 골칫거리가 되어갔습니다. 군인들이 오냐오냐 키웠기 때문인지, 자꾸만 여기저기서 말썽을 부렸습니다. 게다가 전쟁 영웅이라 먹을 수도 없고 뒤치다꺼리만 해야 했기에 영국군의 골칫거리가 되었죠. 닭장에 쳐들어가 닭 모이를 와구와구 훔쳐먹다 끌려 나오기도 했으니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을지 상상이 가시죠? 결국 참다못한 해군 훈련 시설에서는 티르피츠를 쫓아내 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화창한 어느 날, 느긋하게 일상을 즐기던 티르피츠에게 열 명의 남자가 달려들었고, 티르피츠는 다시 글래스고호의 함장이었던 존 루스에게 보내졌습니다. 얼결에 티르피츠를 다시 만나게 된 그는 티르피츠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습니다. 바로 지속되는 전쟁에 큰 힘이 되어주는 적십자사 기금을 모으기 위한 경매에 티르피츠를 내보내는 것이었죠. 존 루스의 손에서 떠나보내기에 좋은 핑계이긴 했지만 불쌍한 티르피츠에게 좋은 결정은 아니었죠.

경매에 날 보내버린다고요?
1917년 12월 11일, 티르피츠는 몇몇 물품과 함께 경매장에 올랐고 포틀랜드 공작에게 400기니에 낙찰되었습니다.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3,500만 원 정도입니다. 새 주인에게 가게 된 티르피츠는 농업지원 기금 조성을 위한 전국 투어를 시작했습니다. 티르피츠의 전국 순회로 벌어들인 돈은 폭격 당해 피폐해진 땅을 되살리고 농부들의 숨통을 틔워주는데 쓸 목적이었죠. 티르피츠는 그 뒤로도 몇 차례 경매에 올랐는데, 이 역시 전쟁자금을 모으기 위함이었기에 포틀랜드 공작이 몇 번이나 재구매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 티르피츠는 여생을 보내다 자연사했다고 전해집니다. 티르피츠가 떠난 뒤, 포틀랜드 공작은 티르피츠의 머리를 박제해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티르피츠의 머리는 그 후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박물관의 벽에 걸려있습니다. 참고로, 티르피츠의 발 뼈로 만들어 은 장식을 덧붙인 칼도 있는데 이 역시도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독일군의 침몰하는 전함에서 탈출해 영국군의 마스코트가 되고, 전국을 순회하다 전쟁 박물관에 간 티르피츠. 그 놀랍고 독특했던 돈생을 살짝 엿보기 위해서라도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에 가보세요! 혹시 모르죠, 여러분도 티르피츠처럼 인생역전의 주인공이 될지!

2022-06-01

이주은: 포털 사이트에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며 ‘동화보다 재미있는 세계사’로 주목받았다. 현재는 방문자 600만 명의 파워블로그와 ‘눈숑눈숑 역사탐방’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스캔들 세계사》 시리즈와 《개와 고양이에 관한 작은 세계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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