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공감

아일랜드 더블린

글 _ 박진배

예술의 아일랜드




아일랜드는 유럽의 다른 관광 명소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배낭여행 일정으로 아일랜드를 방문한다고 하면 일부는 의아하게 바라볼 정도다. 하지만 아일랜드는 예술이 아주 잘 발달한 곳이다. 영화 ‘원스’처럼 길을 걸어가기만 해도 펍에서 훌륭한 연주자들을 만날 수 있고 ‘제임스 조이스’처럼 유명한 작가들의 흔적을 따라 문학 여행을 즐길 수도 있다.

*국립도서관 National library of Ireland in Dublin

문학의 중심지, 그리고 블룸스데이
1845년 아일랜드에 닥친 감자기근은 아일랜드인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다. 인구는 많은데 식량은 턱없이 부족해 사람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던 20세기 초 아일랜드에는 빈곤과 절망의 풍경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혼란과 가난 속에 문학이 꽃을 피웠고, 이는 세계에 신선한 충격과 힘을 주었다.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은 문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여행하는 목적지로 자리 잡고 있다.
‘하루의 오디세이’라 불리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Ulysses)》는 1904년 6월 16일 하루 동안 더블린의 길을 걸으며 서사적 여행을 하는 주인공의 18가지 에피소드를 편집한 소설이다. 속담과 신화, 방언을 막론한 백과사전 같은 해박함과 난해함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 ‘블룸’과 그의 행적을 기념하는 날이 6월 16일 ‘블룸스데이(Bloomsday)’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오래된 이 문학 성지순례 행사는 1954년 작가 몇 명이 마차를 타고 책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방문하기 시작한 데서 유래했다. 사람들은 당시의 패션으로 옷을 입고 책에서 주인공 블룸이 다니던 병원, 도서관, 시장, 학교, 펍을 방문한다. 레스토랑에 들러서는 책 속의 주인공이 먹던 내장요리, 치즈 샌드위치를 먹고 부르고뉴 와인을 마신다. 하루 동안 도시 전체가 거리의 카니발이 된다. 전 세계의 문학 애호가와 관광객들이 모여 작품을 회상하고 강연, 책 낭독과 같은 문학 행사에 참여한다.


더블린 시내는 바둑판처럼 구성되어 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다른 각도에서 새로운 장면이 보인다. 길거리마다 등장하는 펍을 들러보는 것도 큰 재미다. 책 중 대사처럼 더블린 거리의 펍을 지나치지 않고 걷기란 몹시 어려운 퍼즐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책을 읽으면 더블린의 전경뿐 아니라 담벼락, 길바닥, 건물의 정문 같은 디자인 요소들, 그리고 도시의 소리와 냄새까지 느낄 수 있다.

 
 

더블린에서의 가장 평범한 하루를 기록하고자 했던 조이스는 소설을 쓰며 친구에게 “이 도시를 정확하게 기술해서, 지구상에서 사라지더라도 내 책을 보면 다시 지을 수 있게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문학을 통해 도시가 기억되는 방법만큼 강렬한 것은 없다. 그림이나 사진, 영상도 아닌, 문장으로 하나의 도시가 묘사되는 것은 도시로서도 영광이고, 그 생명력 또한 무한하다. 약 70년간 블룸스데이에 더블린 거리를 걸었던 사람들의 기억과 여정으로 이 도시의 이미지를 그려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아란 섬의 스웨터
파도에 밀려 해안가로 떠내려 온 스웨터를 발견한 어머니가 고기잡이를 나갔던 아들의 죽음을 알고 슬퍼한다. 극작가 ‘싱(J.M.Synge)’의 연극 ‘바다의 사나이들(Riders to the Sea)’의 한 장면이다. 아일랜드 문학의 르네상스라 평가되는 이 작품은 아란 섬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경험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그려낸 명작이다. 1904년 초연된 이후 수많은 연극 무대에 올랐고 오페라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아일랜드 서쪽, 대서양 대륙의 끝에 세 개의 섬이 있다. 이니시 모어, 이니시 만, 이니시 어로 구성되어 아란 제도라 불린다.


사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전혀 개발되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곳엔 안개비가 자주 오고 간혹 돌풍과 거센 폭풍이 몰아친다. 석회암의 가파른 절벽 위로는 선사시대부터 남겨진 돌담이 연결되어 있다. 그 돌담들 사이로 마치 대형 퀼트 작품 같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그 위에 야생화와 들풀, 얼룩소와 양들이 한가하게 노닌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답다. 이 고요함 속에 유일하게 들리는 건 바람과 파도, 갈매기의 울음소리뿐이다. 이곳에 아주 적은 수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듬성듬성 위치한 집들 말고는 몇 개의 학교와 교회, 동네 주점이 전부다. 농업이나 어업이 생업의 대부분, 생활은 극도로 소박하고 간결하다. 섬 생활이 그렇듯이 어디 갈 곳이 없으니 사람들은 언제나 한가롭고, 마음에 걱정이 없다.


아란 섬에는 집마다 아내들이 스웨터를 짜서 어부인 남편과 아들에게 입혀 주는 전통이 있다. ‘아란 스웨터’는 키우는 양의 털을 다듬어 손으로 일일이 짠다. 고기잡이배에서 한밤중의 풍랑에도 견딜 수 있도록 꼼꼼하게 간격을 좁힌다. 이 스웨터는 통풍이나 방한 효과가 좋고 체온도 일정하게 유지해 준다. 양모의 천연 기름은 방수 역할을 한다. 패턴 또한 다양하다. 초창기에는 이들의 근원인 켈트족의 켈틱(Celtic) 문양을 참고로 했지만, 곧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을 응용했다. 섬에서 흔히 보이는 산딸기, 바위에 붙은 이끼들도 스웨터에 새겨져 있다. 어름 잡아 스물네 개의 다른 구성 방식이 있는데, 그 복잡한 패턴 때문에 보통 십만 번 정도의 땀이 필요하다. 여기에 가문의 문장이나 집안 고유의 문양도 더해진다. 당연히 집마다 패턴이 다르게 나온다. 그래서 스웨터가 해안으로 떠서 내려오면 내 남편이나 아들이 사고로 죽었다는 걸 인지하는 것이다.



스웨터의 패턴은 집안의 전통과 지역의 풍습, 종교적 의미마저 포함한다. 이런 문양과 패턴의 내용들이 문자로 기록된 적은 없다. 대대로 어머니로부터 딸에게, 며느리에게 뜨는 방법이 물려 내려왔을 뿐이다. 진지하고 심오하다. 단지 모양만 예쁘게 뜨는 것이 아니다. 아내의 마음으로, 어머니의 마음으로 짜는 스웨터에는 양모만큼이나 따듯한 가족의 마음을 담는다. 그래서 스웨터는 단지 몸을 보호하는 기능 이외에 삶의 본질까지 갖추게 된다.



실로 오랜 세월과 세대를 거쳐 전수되어 왔지만 고립된 아란 섬의 위치 때문에 이 스웨터가 알려진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1956년 패션 잡지 보그(Vogue)에 처음 소개되고 1960년대의 미국 시트콤의 배우들이 입으면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다. 후에 ‘장 폴 고티에’ ‘다카다 겐조’와 같은 디자이너들이 이 스웨터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빠삐용’ ‘타워링’ 등의 영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배우 ‘스티브 맥퀸’이나 옛 모나코의 왕비 ‘그레이스 켈리’도 이 스웨터의 열정 팬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제는 거의 해마다 밀라노, 런던, 파리의 패션쇼에 단골로 등장한다. 지금은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아일랜드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꼭 한 벌씩 사는 제품이 되었다. 바야흐로 유명 수제품 중 하나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고립된 섬에서 기르는 양으로부터 털을 얻어 옷을 만드는 소박한 자급자족의 경제에서 만들어진 스웨터가 오랜 문학의 한 장면과 함께 세계적인 패션이 되었다.



아일랜드에서는 비가 오는 동시에 햇살이 빛나는 풍경을 자주 볼 수 있다. 너무나 조용하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 자연을 자세히 관찰하게 된다. 이렇게 보고, 사색하고, 음미하고, 꿈꾸다 보면 창작하게 된다. 시적 상상력이 발현된다. 이것이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배경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스토리들을 살펴보는 건 여행의 수준을 높이고 경험을 풍요롭게 해준다. 예술의 나라 아일랜드의 풍요로움을 만끽해보자

2023-06-01

박진배: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학교 명예석좌교수다. 인테리어디자이너로 서울의 ‘민가다헌’ 뉴욕의 ‘프레임 카페’와 ‘곳간’을 디자인했다. 저서로는 《천 번의 아침식사》 《공간미식가》 《뉴욕 아이디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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