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공감

프랑스 그라스

글 _ 박진배

Le Petit Village의 향수



각 나라에는 규모나 기반 시설이 그럴듯한 대도시들이 있다. 수도만 놓고 보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차이를 알기 힘들다. 하지만 시골을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작은 마을의 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선진국의 공통된 정책이다. 작은 마을의 아름다움을 잘 살리고, 가꾸며, 홍보하는 대표적인 나라는 프랑스다. 무질서한 총천연색 간판이나 유치한 조형물은 찾아볼 수 없다. 프랑스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작은 마을에 있다.

프랑스의 예쁜 마을
예쁜 마을들의 공통점은 뭘까? 대도시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역사와 풍토, 문화가 바탕인 색다른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벽화가 유행하면 따라 그리고, 구름다리가 명물이 되면 똑같이 설치하고, 어느 마을이 특정 색깔로 유명해지면 다른 색으로 색칠하는 등의 행위는 마을의 경쟁력을 해치고 식상하게 만든다.
프랑스를 여행하다 보면 간혹 ‘프랑스의 예쁜 마을(Les Plus Beaux Villages de France)’이라는 작은 간판을 볼 수 있다. 1982년 결성된 한 민간단체가 심사하여 채택된 마을에 부여되는 명칭이다. 자격 조건은 2천 명 이하의 인구, 유적지의 보유, 그리고 깨끗하고 예쁜 환경의 보존이다. 역사적, 지형적, 문화적 특징을 지닌 아름다운 마을이 선정 대상이며, 프랑스 전역에 160여 개가 있다.



작은 마을에는 장점이 많다. 우선은 자연과 가깝다는 점이다. 공기가 맑은 것은 물론이고, 동산, 개울, 숲이 곁에 있어 산책이나 낚시, 등산 등의 야외활동에 적합하다. 느린 삶의 속도도 큰 매력이다. 간혹 소, 말, 닭이 보이고 풀 냄새, 땅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마치 산업사회 이전 시대에 존재하는 것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다.
친밀한 지역사회 정서도 장점 중 하나다. 철물점 주인은 동네 사람들이 어떤 집에 살고, 수리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고 있다. 서점은 한두 군데밖에 없지만 대학을 나온 해박한 주인이 읽을 만한 책을 잘 편집해서 진열해 놓고 있다. 식당에서 직원은 손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문받고 “어제도 같은 거 드셨지요?”와 같은 대화를 건넨다. 이런 정겨움은 외부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주민들은 집 앞의 그네나 흔들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웃는다. 환대와 친절은 프랑스의 작고 예쁜 시골 마을의 진정한 가치다.

*미너브 마을 Miver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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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드와 마을 d’Oingt (우)이귀사임 마을 Eguisheim

보졸레 와인과 풍차
프랑스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분야가 바로 와인이다. 아름다운 마을과 와인 밭이 어우러진 모습 역시 프랑스의 대표적인 경관이다. 세계 최고의 와인들을 생산하는 프랑스 부르고뉴의 보졸레 지역은 부르고뉴에서 가장 넓은 와인 밭과 아름다운 경관을 가지고 있다. 어딜 가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크뤼(Cru)’란 프랑스어로 ‘재배’ 또는 ‘포도원’을 뜻한다. 주로 유명한 와인이나 와인 생산지를 분류할 때 사용된다. 보졸레에는 품질 좋은 10곳의 크뤼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보졸레의 왕으로 불리는 ‘물랑 아 방(Moulin-A-Vent)’이다. 풍차라는 뜻으로 15세기에 만들어져 450년간 사용되던 풍차가 마을 한 가운데 있다. 현재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부에 들어가서 관람도 할 수 있다. 사다리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창밖으로 엷은 핑크빛 화강토의 포도밭이 눈에 들어온다. 1층에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진열된 여러 생산자의 와인은 엷고 밝은색, 과일과 꽃 향이 복합된 힘찬 맛을 자랑한다.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은 프랑스에서 지정한 ‘보졸레 누보의 날’이다. 보졸레 누보는 그해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 포도송이부터 잔에 담길 때까지 두 달밖에 걸리지 않는 젊은 와인을 말한다. 농부들이 추수 후에 쉽게 마시던 이 와인은 성공적인 마케팅 덕분에 1990년대부터 보졸레 와인 수출의 35%를 차지하는 효자상품이 되었다. 맑은 자주색에 누구에게나 쉬운 딸기 풍선껌 맛, 그리고 미국의 추수감사절과 절기가 맞물리면서 잘 알려졌다. 가을의 수확을 경축하기 위해 화려한 라벨로 디자인되는 것도 보졸레 누보의 전통적인 특징이다. 보졸레 마을의 와인들은 닭, 칠면조 요리와 매우 잘 어울린다. 물론 돼지고기 안심구이나 겨자소스를 바른 토끼 요리와도 괜찮다.



세계 최고의 향수가 만들어지는 곳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의 ‘그라스’는 인구 5만 명의 작은 도시다. 16세기까지 가죽 공예로 유명했던 그라스는 늘 동물 냄새가 진동했다.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꽃을 심고, 꽃으로 포마드를 만들어 가죽 장갑에 발랐다. 해당 제품이 인기를 끌면서 그라스에선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향수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향수 산업의 절반 이상이 이곳을 기반으로 한다. 세계 49개 언어로 번역되고 2천만 부가 팔린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 영화 ‘향수’에서도 그라스가 배경이다. 프랑스의 국민가수 ‘에디트 피아프’가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향수를 만드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꽃잎이 필요하다. 온화한 지중해 기후와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해발 350m의 언덕, 물이 풍부한 그라스의 토양은 장미, 라벤더, 아이리스가 자라는 최적의 환경이다. 샤넬의 넘버5 향수는 고급스러운 꽃향을 위해 그라스의 재스민과 장미만을 사용한다. 특히 16세기 무어인들이 가져온 재스민은 향수의 핵심 재료다. 매년 27톤의 재스민이 여기서 재배된다. 전 세계의 조향사들은 그라스에서 2천여 종류의 향을 분류하고 조합하는 훈련을 받는다. 조향은 원초적인 향, 머리에서 인지하는 향, 그리고 마음이 끌리는 향의 복잡함을 다루는 과정이다. 음악의 작곡과 같은 심오한 세계다. 그라스의 꽃밭은 자연의 연구실이고 그라스에서는 정원사가 조향사만큼 중요하다.

*향수 회사 갈리마드 Galimard
향수 이외에도 비누, 로션, 초 등의 제품부터 아이스크림, 초콜릿, 과자, 음료 등 음식에 사용되는 향까지 모두 여기서 만들어진다.

3백 년 조향 역사의 그라스를 진입할 때면 멀리서부터 향기가 난다. 미로와 같은 골목길, 가로수 그늘의 광장 변으로 향수를 파는 상점들이 배경을 이룬다. 가을이 시작되는 무렵이면 봄, 여름에 채집한 꽃으로 향수 만들기의 기초 작업이 시작된다. 추억을 기록하는 향, 그리고 유혹의 향을 만들기 위해서 그라스의 조향사들이 바빠지는 계절이다. 2018년 유네스코는 그라스의 조향 기술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그라스의 한 향수 상점
이 마을에는 60개 회사에서 3천여 명의 사람들이 향수 제조와 연관된 일을 하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랑스의 기념비적인 건물, 박물관, 패션이나 음식에서 잠시 눈을 돌려보자. 프랑스는 시골 곳곳에 나름의 특성과 매력을 간직하며 전 세계 여행객을 초대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와인 밭과 발코니의 꽃들로 예쁘게 가꾸어진 마을들, Le Petit France가 우리를 기다린다.

2023-05-01

박진배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학교 명예석좌교수다. 인테리어디자이너로 서울의 ‘민가다헌’ 뉴욕의 ‘프레임 카페’와 ‘곳간’을 디자인했다. 저서로는 《천 번의 아침식사》 《공간미식가》 《뉴욕 아이디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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