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공감

영국 헤이 온 와이

글 _ 박진배

매일 바라보는 것의
미(美)


영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격식 있게 옷을 차려입은 신사들, 템스강을 배경으로 한 고풍스러운 건물과 다리들, 빨간 이층 버스와 블랙 캡이 다니는 런던 거리의 모습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시 경관 외에도 구불구불한 길과 산, 양들이 풀을 뜯는 초원의 목가적인 시골 모습 또한 영국의 대표적인 풍경이다. 조용한 시골의 정취, 아기자기한 시골의 맛을 느껴보는 것도 영국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다.


 
산책길을 따라서
영국인은 산책을 아주 좋아한다. 시간 날 때마다 가까운 산책로를 찾아 걷는 것이 생활의 일부다. 영국의 시골은 구석구석 조경이 아름답게 되어 있어 스페인이나 프랑스처럼 넓은 땅을 가진 나라들보다도 걸을 수 있는 길이 훨씬 많다. 전 국토에 국가가 지정한 공공 산책로(Public Footpath)들이 퍼져있고 산책 지도도 잘 준비되어 있다.



‘길의 권리(Right of Way)’라고 불리는 통행권 제도는 영국에서 수백 년간 지켜져 온 문화다. 개인 사유지라도 공공 산책로로 지정됐다면 사람들에게 개방하고 산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람은 드나들고 가축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장치가 되어있는 문을 ‘키싱 게이트(Kissing Gate)’라고 부른다. ‘입술을 살짝 대다’라는 ‘Kiss’의 어원처럼 영국인은 키스와 같은 설렘으로 키싱 게이트를 열고 산책을 시작한다.
시골을 산책하는 것은 날아가는 새와 풀 뜯는 말, 부드러운 바람, 이 모든 자연을 친절하게 기록하는 경험을 준다. 어제와 다른 지적 마주침도 있다. 스스로 길 자체가 되는 경험이다.

*햄블턴 홀 Hambleton Hall
영국 시골 호텔은 언제나 산책길 지도와 함께 발 사이즈 별로 장화를 마련해 둔다. 자신들의 정서와 문화, 그리고 스타일로 방문객을 초대하는 것이다.


비밀의 화원으로 떠나는 여행



*그랜틀리 홀 Grantley Hall
그랜틀리 홀 호텔의 정원. 영국 어린이 동화 《피터 래빗》에 나오는 작은 토끼 피터가 어디선가 깡총하고 튀어나올 것만 같다.

영국인의 생활에서 산책만큼 중요한 것은 정원이다. 영국인의 정원 사랑은 유별나서 사람을 평가할 때도 그 집 정원의 수준으로 평가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정원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가장 직접적이며, 의도적이고 미적인 방식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소설 《비밀의 화원》부터 ‘제시카 브라운’ 주연의 영화 ‘디스 뷰티풀 판타스틱’에 이르기까지 정원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탄생하는 곳이 영국이다. 영국에는 정원과 관련된 작가, 디자이너, 사진가, 역사가 등 수많은 전문가가 있고 정원을 주제로 한 전시회나 박람회도 연중 열린다.
영국 정원의 양식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에 만들어졌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전통 정원 양식인 기하학 모양을 파기하고, 목가적이고 자연미를 살리는 접근을 추구했다. 그래서 잔디밭과 같이 넓게 열린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고 사람이 만든 건축물이나 조각, 다리와 같은 인공적 요소는 최소화한다. 연못을 만들 때도 가능하면 기존의 운하나 개울을 이용하고, 담벼락이나 퍼걸러(Pergola)*와 같은 구조물이 있으면 담쟁이나 꽃 등을 주변에 심어서 타 넘어가도록 한다. 확장된 시야와 연속되는 경관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퍼걸러 Pergola
뜰이나 편평한 지붕 위에 나무를 가로와 세로로 얹어 놓고 등나무 따위의 덩굴성 식물을 올리어 만든 서양식 정자. 장식과 차양의 역할을 한다.


*맬러리 코트 (Mallory Court Country House) & 라임 우드(Lime Wood) 호텔의 정원

영국 정원의 본질은 그 안을 거니는 것이다. 기하학적으로 조성된 길을 따라가는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정원과 다르게 영국은 산책길을 작게 만든다. 조경을 가로지르거나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정원이 자연미를 강조하면서 부드럽게 배치되어 산책길의 흐름도 구불거리고 유연하다.
또한, 나무 한 그루를 열린 공간에 고립시킴으로써 크게 보이게 만들거나, 작은 관목들을 곁에 두어 대비시키는 기법을 활용하기도 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의 각도를 바꿀 때마다 눈앞에 색다른 경관이 펼쳐지지만 전혀 계획된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정원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영국인들에게 놀이고, 인생이며, 추억이다.


*햄블턴 홀(Hambleton Hall)의 정원
 
문학의 영국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방 경계에 위치한 ‘헤이 온 와이(Hay-on-Wye)’는 인구 1천 500명 정도의 작고 한적한 마을이다. 쇠락해가던 이곳에 변화가 생긴 건 1962년, 옥스퍼드대학교 출신의 책 애호가 ‘리처드 부스(Richard Booth)’가 첫 서점을 열면서부터다. 이후 수십 개의 서점이 차례로 개점하면서 ‘책마을’을 탄생시켰다. 인구 60명당 서점이 하나 있다는 이 마을에서 매년 백만 권 이상의 책이 판매되고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이 마을이 동기가 되어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호주, 미국, 한국의 헤이리 등 세계 곳곳에 책마을이 만들어졌다. 1988년부터 매년 5월에 열리는 ‘헤이 페스티벌’에는 ‘스티븐 호킹’ ‘빌 클린턴’ 등이 참여해 연설한 적도 있다.
마을에는 영화 서적, 시집, 추리소설, 아동 서적 등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점들과 중고, 희귀본 서점들이 있다. 유명 출판사인 ‘펭귄북스’의 책만 따로 분류해 놓은 곳도 있다. 서점 내부에는 셰익스피어를 비롯해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버지니아 울프, 아가사 크리스티에 이르기까지 영국이 자랑하는 작가들의 책이 끝도 없이 진열되어 있다.
창가에 전시된 셜록 홈즈와 해리 포터 책을 구경하다가 상점 문을 열면 은은하게 풍기는 책 향기가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방문객 대부분은 책방을 둘러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책을 구입한다. 성(城)의 지하와 거리 곳곳에 무인 책 판매대들도 설치되어 있다. 독서와 함께할 수 있는 찻집, 맛있는 과자가게 등도 있다. 여행객들이 많다 보니 앤티크 상점이나 레스토랑, 숙소도 생겼지만, 주인공은 역시 책이다. 어디서 인증사진을 찍어도 책이 등장해서 지적인 배경을 만들어 준다. 책으로 꾸며진 풍경이 하나의 마법처럼 작용하는 걸 보는 게 참 신선하다. 그야말로 책의 ‘식스 센스’를 느낄 수 있는 마을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하지만 모든 책은 헤이 온 와이로 통한다."

영국인들에게는 매일 바라보는 것의 미적 가치가 중요하다. 드러나지 않지만 늘 곁에 있는 것, 자연과 정원, 그리고 문학이 이들의 낙원이다. 삶의 질을 위해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의식하고, 능력이 닿는 만큼 소박하게라도 산책을 하고, 정원을 가꾸고, 책을 접하는 것이다.

2023-03-02

박진배: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학교 명예석좌교수다. 인테리어디자이너로 서울의 ‘민가다헌, 뉴욕의 ‘프레임 카페’와 ‘곳간’을 디자인했다. 저서로는 《천 번 의 아침식사》 《공간미식가》 《뉴욕 아이디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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