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공감

미국 뉴욕

글 _ 박진배

잠들지 않는 도시,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Empire State Building
‘킹콩’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등 수많은 영화의 배경을 장식한 건물이다. 밸런타인, 핼러윈, 911, 크리스마스 등의 날이면 변하는 꼭대기의 조명은
뉴욕 사람들에게 친숙한 일상 대화 소재다. 철새들의 이동 시즌에는 철새 보호를 위해서 불을 켜지 않는다.


한 미국 여행안내서 첫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자연이 만든 것을 보려면 서부로 가고, 인간이 만든 것을 보려면 동부로 가라!” 그리고 미국 동부의 대표 도시는 물론, 뉴욕이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도시이자,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도시다.
뉴욕은 세계의 중심도시로 세계 경제의 아침을 여는 곳이며,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신문이 발행되는 도시이자, 세계 제일의 금융시장이 존재하는, 잠들지 않는 도시다. ‘고담(Gotham)’과 ‘빅애플(Big Apple)’이라는 두 개의 상징적 별명으로도 유명한 뉴욕은 정보와 욕망을 구체화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간직하고 있다. 브로드웨이와 현대 미술, 멋진 사람들과 훌륭한 음식이 있는 슈퍼타운이다.

뉴욕의 건축은 사람과 대화한다
뉴욕은 하나의 거대한 ‘건축 박물관’이다. 다양한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다는 점, 유명한 건축가들의 작품이 군집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실제로 뉴욕의 거리를 걷거나 버스를 타고 이동해 보면 지역이 변할 때마다 건축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숨 막힐 것 같은 장면으로 다가오는 스카이라인의 병풍 속에서 뉴욕의 건축물들은 사람들과 친절한 대화를 청하고 있다.



로워 맨해튼의 ‘트라이베카(Tribeca)’ 지역에 위치한 한 소방서가 대표적이다. 이 소방서는 1903년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 커다란 아치 한가운데 멋진 금박 장식이 조각되어 있다. 석재로 된 외벽은 고전 건축의 규칙과 질서를 강조하지만 세밀하게 새겨진 문양들이 아주 정겹게 다가온다. 그 장식성과 친근함 때문에 이 소방서는 1984년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Ghostbusters)’ 단원들의 본부로 등장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소방서 앞에 영화 속 ‘찐빵귀신’의 로고를 페인트칠해 놓았다. 2015년, 장난감 회사 ‘레고’에서는 4천 634조각으로 만들어진 이 건물의 모형을 출시하기도 했다. 레고 역사상 아홉 번째로 커다란 블록 세트다.

‘건물이 인간과 대화하고 싶을 때 장식을 사용한다’는 말은 뉴욕의 건축물을 보면 알 수 있다. 도시에 시민들이 좋아하고 마음에 품은 건축물이 존재하는 건 꽤 부러운 일이다.


브로드웨이 극장과 공연




뉴욕은 공연의 도시다. 많은 여행객이 뉴욕을 찾는 첫 번째 이유로, 또 뉴욕에서 가장 하고 싶은 첫 번째 일로 연극이나 뮤지컬 관람을 꼽는다. 뉴욕 공연의 메카인 브로드웨이는 매일 8만 명, 일 년에 약 2천 4백만 명이 공연을 관람하며 티켓 판매
액만 9천억 원이 넘는 산업이다. 이런 공연이 이루어지는 극장 또한 유서 깊은 곳이 많다. 우리에게 친숙한 배우 ‘드류 배리모어’ 등의 배우를 배출한 연극계 명문 ‘배리모어(Barrymore)’가(家)의 이름을 붙인 극장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가장 특별한 사연을 간직한 곳은 아마도 ‘부스(Booth) 극장’이 아닐까? 해당 극장은 연극계의 또 하나의 명문인 부스가(家) 형제의 엇갈린 운명을 상징하는 장소다. 1865년 4월 14일, 워싱턴 D.C.의 극장에서 링컨 대통령이 암살된 사건은 전 미국을 충격과 슬픔에 빠트렸다. 링컨 대통령의 암살범은 ‘존 윌크스 부스’로 부스 집안의 막내아들이자 연극배우였다. 그는 늘 아버지와 형의 그늘에 가려 열등감을 느꼈다. 존 윌크스의 형 ‘에드윈 부스’는 연극배우였던 아버지의 명성을 넘어선 미국 최고의 비극 배우였기 때문이다.
1866년 1월, 《햄릿》 공연을 위해서 뉴욕의 ‘윈터가든(Winter Garden)’ 극장 무대에 섰던 에드윈 부스는 연기를 시작할 수 없었다. 바로 몇 개월 전 미국의 대통령을 암살했던 동생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무대에서 ‘줄리어스 시저’를 연기했던 동생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 슬픔 등의 복잡한 심경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렇게 아무 말도, 어떤 움직임도 시작하지 못한 상태로 극장 안에 몇 분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때 객석에 앉아있던 관객들이 하나둘 일어나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관객 모두의 기립 박수에 그는 비로소 연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뉴욕의 작은 공원 ‘그래머시 파크(Gramercy Park)’ 안에는 햄릿으로 분장한 ‘에드윈 부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람들은 그를 암살범의 형이 아닌 위대한 배우로 기억하고 있다. 맨해튼을 메우고 있는 아파트 한 채 한 채가 연극의 무대라는 표현처럼, 뉴욕의 다채로운 모습 모두는 하나의 장대한 드라마다.

Fancy한 미식의 성지 뉴욕
이민자들이 많은 뉴욕에는 각 나라 출신의 특급 셰프들이 진검승부를 벌이고 있다. 덕분에 전 세계의 다양한 음식들이 수만 개 레스토랑을 통해서 연중 제공된다. 첨단 미식의 흐름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근래 들어 뉴욕 요식업계의 재미있는 경향 한 가지가 있는데 흔히 ‘닫은(Closed) 레스토랑’ ‘프라이빗 레스토랑’이라고도 불리는 ‘숨은(Hidden) 레스토랑’의 증가다. 셰프의 집이나 손님이 요청한 별도의 공간에서 초청, 예약으로 운영되는 형식이다. 도심의 펜트하우스, 루프톱, 오래된 주택의 정원과 같은 특별한 장소다 보니 이색 공간에서 미식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매력도 있다. 열린 주방에서 셰프에게 직접 메뉴 설명을 들을 수도 있고 셰프의 조리를 지켜볼 수도 있다. 셰프는 손님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친밀한 대화를 건넨다. 그야말로 요리 잘 하는 친구의 집에 초대받은 느낌이다. 셰프는 뉴욕의 비싼 임대료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인원과 시간을 미리 알고 있으므로 음식 준비가 수월하고 식재료의 낭비도 적다. 고객 관리도 상대적으로 편하다. 아는 지인끼리 인원을 맞추어 통째로 대관할 수도 있고, 적은 수로 참석하면 초대받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도 있다. 메뉴 선택을 고민할 필요도 없다.
뉴욕의 유명 레스토랑들은 이미 관광객들로 점령된 지 오래다. 진정한 뉴요커들은 이렇게 나만 아는 공간에 초대되어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경험을 즐기고 있다.

*칼라일 호텔 The Carlyle Hotel
지난 35여 년간 거르지 않고 매주 월요일마다 영화배우 우디 앨런이 ‘뉴올리언스 재즈 밴드’와 함께 클라리넷을 연주하곤 했다.

*에르미니아 레스토랑 Erminia Restaurant
거의 매일 저녁 한두 테이블에서 청혼 장면이 목격되는 곳이었다. 다소 어두워서 ‘식사 중 화장실을 갈 때는 조심해야 한다.
종종 길목에서 청혼하느라 무릎을 꿇고 있는 예비 신랑들에게 걸려 넘어지는 경우가 있다’라는 재미있는 주의사항이 존재했다. 지금은 폐업 상태다.

헬렌 켈러는 “뉴욕에 다녀올 때마다 나는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고 내가 꿈을 꾸는 것이 아님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바로 뉴욕의 이런 문화와 분위기를 체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도시의 거친 힘, 그리고 무늬목처럼 정교한 세련됨이 바로 뉴욕의 문화다. 뉴욕은 이렇게 혼란한 환경 속에서 정연한 감성이 존재하는 도시다.

2023-02-01

박진배: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학교 명예석좌교수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서울 ‘르 클럽 드 뱅’ 뉴욕 ‘사일로 카페’ 등을 디자인했다. 저서로는 《디자인 파워플레이》 《영화 디자인으로 보기》 《뉴욕 아이디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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