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 세계사

포르투갈 레이리아

눈이 마주친 순간 번개라도 맞은 듯 사로잡히는 운명적인 사랑이 존재할까요? 배경이나 지위를 뛰어넘고 세월 앞에서도 무뎌지지 않는 사랑 말이죠. 현실에서 그런 사랑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토록 흔치 않기에 오랜 전설로 남은, 어느 왕과 시녀의 사랑 이야기가 포르투갈에 전해져 내려옵니다.
글 _ 이주은(《스캔들 세계사》의 저자)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 이야기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포르투갈 레이리아 주에 가면 하얀 벽과 붉은 지붕의 건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있는 우아한 아이보리 색의 탑을 뽐내는 건축물이 바로 12세기에 세워진 ‘알코바사 수도원’인데요. 198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알코바사 수도원은 포르투갈 특유의 고딕 양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딕 양식이란 높은 건물과 뾰족한 첨탑이 인상적인 수직적 구조의 건축 양식을 말합니다.

알코바사 수도원 안에는 두 개의 커다란 석관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하루가 다 갈 정도로 아주 섬세한 조각으로 꾸며진 이 두 개의 석관은 포르투갈의 왕 ‘페드루 1세’와 그의 하나뿐인 사랑, ‘이녜스 데 카스트루’의 관입니다. 각각의 관에는 6명의 천사들과, 6마리의 맹수, 그리고 두 사람의 생애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당신과 눈을 마주친 순간

14세기, 포르투갈 왕세자인 페드루는 스페인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공주 콘스탄세와 정략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신부 콘스탄세는 또래의 신랑을 만난다는 생각에 들떠있었죠. 하지만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날, 신랑 페드루는 신부 콘스탄세가 아닌 그를라온 시녀, 이녜스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남자가 바람을 피워도 딱히 흠이 되지 않았던 시대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결혼하기 전부터 신부의 시녀와 눈이 맞은 신랑이라니! 페드루의 아버지인 포르투갈의 국왕 알폰수 4세는 아들의 철없는 행동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당시 결혼은 두 나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죠. 알폰수 4세는 아들을 불러 타이르기도 하고 혼을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사랑 앞에 눈이 멀어버린 페드루에겐 ‘소귀에 경읽기’였습니다. 
국왕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겠거니 싶어 이녜스를 수녀원에 감금하거나, 국외로 추방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페드루는 몰래 수녀원의 수도관을 통해 편지를 물에 흘려보내기도 하고, 며칠 사냥을 다녀오겠다는 핑계로 이녜스를 만나러 가기도 했습니다.


싸늘한 통보
페드루의 관심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신부 콘스탄세는 아들을 낳고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은 페드루에게 재혼하라 말했지만 페드루는 이녜스와 결혼할 수 없다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답할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페드루는 이미 이녜스와 함께 살며 아이들을 넷이나 낳았습니다. 일찍 사망한 첫째를 제외하면 무척 건강한 아이들이었죠. 콘스탄세의 외동아들은 상대적으로 병약했기에 국왕과 귀족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국왕은 드디어 결심한 듯 직접 이녜스를 찾아갔습니다. ‘이제 날 인정해 주시는걸까?’라고 생각한 이녜스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국왕을 마중 나갔습니다. 하지만 국왕의 얼굴은 얼음같이 차가웠고, 놀라서 주춤거리는 이녜스에게 들려온 건 싸늘한 사형선고였습니다. 이녜스는 결국 자녀들이 울부짖는 앞에서 목이 잘려 처형되었죠. 이 참혹한 사건을 알게 된 페드루는 이녜스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분노에 휩싸여 그녀를 죽인 사람들에게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이녜스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인 1357년, 왕위에 오른 페드루는 자신은 이미 이녜스와 결혼한 사이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모두 왕자와 공주 자리에 올렸습니다. 귀족들은 펄쩍 뛰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페드루는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그는 대관식에서 아름다운 옷과 값비싼 장신구로 치장한 이녜스의 시신에 왕관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이녜스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충성을 맹세하게 시켰습니다.
페드루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녀를 죽인 사형 집행인 중 2명을 추적해 심장을 뽑아버렸습니다. “너희가 나의 심장을 도려내었으니 나 역시 너희의 심장을 가루로 만들겠다”라고 말하면서요.



페드루가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이녜스와 함께 알코바사 수도원에 안치되었습니다. 보통 부부의 관은 나란히 놓지만 페드루와 이녜스의 관은 마주 보게 놓여있습니다. 그 이유는 심판의 날(《성경》에 나오는 세상의 마지막 날. 모든 죽은 사람들이 부활한다고 전해져 온다)이 오면 이녜스를 제일 먼저 보고자 했던 페드루의 소원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석관에는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Ate ao Fim Do Mundo)’라고 새겨져 있답니다.


따뜻한 바다와 낭만적인 도시로 서핑객들의 눈길을 끄는 포르투갈 레이리아. 만일 알코바사수도원을 방문한다면 페드루와 이녜스의 석관을 꼭 확인해 보세요. 석관에 새겨진 그들의 추억, 아이들의 탄생, 페드루의 복수 장면 등 조각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면 마치 애절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2022-03-01

이주은: 포털 사이트에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며 ‘동화보다 재미있는 세계사’로 주목받았다. 현재는 방문자 600만 명의 파워블로그와 ‘눈숑눈숑 역사탐방’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스캔들 세계사》 시리즈와 《개와 고양이에 관한 작은 세계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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