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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유재명

배역에 따라 호흡이 자유롭게 들고 난다. 중저음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강렬하다. 움직임은 섬세하고 날렵하며, 때론 거칠고 묵직하다. 거슬리는 선이 하나도 없는 얼굴에는 수만 가지 표정이 어린다. 배우 유재명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진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다. 그래서일까, 유재명이 마흔이 넘어서까지 무명이었다는 사실은 꽤 놀랍다. 남들은 이미 일가를 이루고도 남았을 마흔쯤에 그는 부산에서 쌓은 연출과 연기 경력을 모두 버리고 서울에 올라와 완전히 새로 시작했다. 대기만성 배우라지만 불확실한 인생을 살아내는 마음은 어땠을까. 그는 자신의 터닝포인트를 어떻게 만들어낸 걸까. 나이 쉰을 맞아 다시금 터닝포인트를 고민하는 그를 만났다.
글 _ 배나영

터닝포인트

스스로 선택하는 변신의 시점



유재명이 맡았던 배역들을 다른 배우들이 연기했다면 작품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비밀의 숲〉에선 검사로 ‘창크나이트’라는 애칭을 얻고, 〈라이프〉에선 의사로 ‘완벽하게 다른 인물로 태어나는 배우’란 평을 받았으며 〈자백〉의 형사로 ‘모든 장르와 배역에서 빛을 발하는 배우’, 〈이태원 클라쓰〉의 장회장으로 ‘어나더 클래스’의 반열에 올랐다. 작품마다 새로운 매력을 뿜어내는 그를 보면, 배우란 모름지기 이래야 하는구나 싶다. 유재명 배우에게 10대 시절은 어땠냐고 물었다.

로동회관에서 영화를 보던 초등학생
10대의 유재명은 아주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은, 주어진 환경에 잘 순응하는 무던한 아이였다고 했다. 구석에 박혀있는 건 아니었지만 리드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운동을 좋아했지만 크게 튀는 친구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담임 선생님이나 친구들의 이름, 혹은 에피소드를 잘 기억하는 친구들에 비해 저는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웃음).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제가 순간순간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지나간 시간은 자동으로 삭제되는 거 같은 느낌이랄까요?”
어쩌면 매일 성실하게 루틴을 소화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는 “성실은 너무 포장된 거 같은데, 어쨌든 사투를 벌이고 있는 거죠”라고 답했다. 자신의 지난날에 대해, 그리고 마주하는 현재에 대해 그는 ‘사투를 벌인다’는 표현을 썼다. 다만, 유재명은 삭제된 기억을 뒤로하고 떠오르는 10대 시절의 한 장면만큼은 남아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장사를 하셨어요. 학교를 마친 후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가면 장사하시는 곳 근처에 영화관이 있었죠. 극장 이름이 ‘로동회관’인데, 흔한 동네의 삼류 영화관이었어요. 300원인가 500원인가 주고 들어가면 영화를 볼 수 있었죠. 그때 어른들 보는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나요. 배우 장미희 씨가 나오는 〈적도의 꽃〉이라던가…극장 안에서 담배 피우는 아저씨들, 삐거덕거리는 철제 의자, 그리고 극장 제일 뒤편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제 모습도 기억나네요.”
꽤 선명하고 구체적인 기억이다. 유재명에게는 초등학교 때 몇 반이었고, 누구와 친했고, 선생님은 누구셨고, 어떤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졌는지보다 영화관에 앉아 있던 순간이 가장 즐겁고 인상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 영화를 봤던 기억 때문인지, 아무런 사건이 없던 아이가 고3 때 갑자기 영화를 하고 싶다고 하게 된 것 같아요. 하지만 선생님들은 반대하시고,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연극 이외의 모든 것이 사라진 순간
부산대학교 생명공학과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걸을 줄 알았다. 하지만 대학교 신입생 때 현재 부산대 효원문화회관인 대학극장의 간판을 보게 되었다. 운명에 이끌리듯 극장 문을 열고, 제일 뒷자리에 조용히 숨어들었다. 마침 연극 동아리 선배들이 판소리를 소재로 한 〈정부사〉라는 공연의 리허설을 하던 중이었다. 극 중의 누군가가 죽고 무대에서 상여가 나가는 장면이었다. 순간 주위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나머지는 전부 뮤트(Mute)되었던 것 같아요.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고, 하얀 꽃들이 빛을 받고, 곡소리가 주는 슬픔이 극장을 가득 메우는 무대의 일루전. 그것들이 만들어낸 감정의 블랙홀에 빠진 듯했어요. 그 블랙홀에 빠진 뒤로는 전 그냥 미친 듯이 연극만 했죠.”
그가 그의 20대와 30대를 오롯이 바친 연극을 만나게 된 건 자신의 의지나 재능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운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 순간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의 순간, 유재명은 연극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가진 것 없는 집안의 조그만 아이가 우연찮게 들락거렸던 영화관, 인생의 한 시점에서 우연히 보게 된 연극의 리허설, 이 두 장면이 지금의 길을 인도한 것 같아요. 연극하고, 술 마시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미워하고, 공연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연애하고, 헤어지고, 작품하고 그렇게 주욱 마흔까지 온 것 같아요(웃음). 그렇게 주욱, 마흔까지.”

연극을 만나 뜨겁게 폭발하던 시절
유재명은 자신의 20대를 자신이 뜨겁지 못한 작업을 견디지 못하는, 폭발하는 시기였다고 했다.
“폭발하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80년대 후반 학번들과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사회의 부조리와 싸우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분노하고 고민하면서 절실할 정도로 뜨거운 어떤 것들을 연극으로 표출하던 시기였죠.”


그는 대학교에서 연출할 때 생긴 상처라며 왼쪽 눈썹 위의 움푹한 흉터를 내보였다. 폭발하던 시기를 상징하는 그 시절의 옹이. 절실함을 강요하고 강요받던 날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공연을 마치고 나서 서로의 활짝 웃는 모습으로 힘을 내던 시절.
그런데 그 시절이 지나자 무수히 많은 동료들이 연극을 그만두고 각자의 진로를 찾아 떠났다. 하지만 유재명은 연극 외의 다른 길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계속한 게 아니라 불안하기 때문에 계속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알 수 없고 불안하니까,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 거죠. 연출을 하고 연기를 하는 동안 연기가 무엇인지, 존재가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뭐랄까, 깊어졌다고 해야 할까요.”
불안함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불안함 속으로 뛰어들어 확실함으로 만드는 것일 테다. 유재명에게는 스무 살에 연극에 입문해서 서울에 올라오던 마흔 살까지 20년간 쌓아 올린 200편에 가까운 작품이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잘 만든 상업극도 있었고, 실수한 연출도 있었지만, 뮤지컬에서부터 실험극까지 정말 다양한 작품과 함께했다고 한다. 그가 연극에 미쳐 있었다는 증거이자 열정적으로 운명을 받아들인 증거, 불안함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증거이자 그의 삶을 대표하는 확실한 데이터다.
“그래서 ‘연극이 아니면 무엇을 하고 싶었냐’는 질문을 받으면 공감이 안 되는 게, 저도 알 수가 없어요. 한 작품을 하고, 다음 작품을 만드는 사이에 모든 것들이 리셋되면서 매번 새롭게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마흔 살, 삶을 리셋하다
재명은 어마어마한 화력으로 불타오르는 참나무처럼 20년 동안 쉼 없이 작업했다. 그러니 번아웃이 올 만도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태워버려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하나도 남지 않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20대 때부터 해오던 모든 것들, 심지어 자신이 몸담았던 극단도 뒤로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엔 영화배우를 해야겠다거나, 유명해져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새로 태어나고 싶다는 느낌? 새로 시작하려면 시간이나 공간을 바꾸어야 하는데, 부산에서는 도저히 새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그게 저의 패턴인 것 같아요. 지난 의미는 지난대로 두고, 포맷시킨다고 할까요?”
모든 것을 버리니 더 낮은 곳에서 처음부터 밟아가야 했다. 그는 부산 연극판에서 존중받는 연출가이자 배우였다. 잠시 멈추었다가 그 자리에서 시작해도 그만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한 ‘포맷’을 택했다.
“저는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내가 밑바닥이라는 생각도 안 해봤고요. 물론 힘들죠. 돈이 없고, 일을 할 수 없는 괴로움도 있었지만 그걸 불행하다고 느끼진 않았어요. 자기애가 강한 편이라서 제가 선택한 삶에 대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단단한 나무는 기어이 불씨를 머금는다. 재가 아닌 숯이 된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단역과 단역 사이를 전전하며 다시 타오를 날을 기다렸다. 그에게 불씨를 제공한 건 〈응답하라 1988〉의 신원호 PD였다. 유재명은 20년 동안 벼려진 칼이었고, 20년 동안 묻혀있던 숯이었다. 작은 불씨로도 누구보다 뜨겁게 타오를 수 있는 그에게 대중들은 열광했다.

최선을 다해 사투를 벌인 시간의 묶음
“보통 사람들은 터닝포인트를 자신의 의지와 연결을 시키는데 저는 의지를 갖고 애써 터닝포인트를 만든 게 아니었어요. 계속해서 고민하고 불안해하면서도 놓지 않았던 삶에 대한, 생존에 대한 최소한의 태도였어요.”
터닝포인트라는 건 밑바닥을 밟고 뛰어오르는 힘이나 삶의 방향을 틀고 싶은 의지, 성공을 향한 목표에서 나오는 줄 알았다. 유재명에게 터닝 포인트는 목표를 향한 의지의 개념이 아니었다.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깊게 고민하며 내딛는 묵직한 한 걸음이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 첫 번째 고리가 탁 걸리면서 연쇄적으로 작품이 이어졌어요. 〈비밀의 숲〉 같은 경우는 지난 시간의 작업들이 준 선물이죠. 불과 몇 년 전인데 이것도 벌써 장면들이 가물가물해요(웃음). 어떤 작품이나 환경이 주어지면 최선을 다해 사투를 벌이고, 저만의 루틴으로 떠나보내고,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또 헤어지게 되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시간의 묶음이 끝나는 시점이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지금 또다시 그 시점에 와 있는 거죠.”
배우 유재명에게 터닝포인트란 지난 시간을 잘 떠나보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자, 새롭게 시작하려는 용기 있는 사람을 위한 인생의 변곡점일 테다.



배우의 운명, 완전한 변신
“저에게 터닝포인트는 항상 지금이에요. 가능하다면, 모든 걸 다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짜 욕심쟁이죠. 유재명 같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유재명 씨 맞아?’ 싶을 정도로 변신해 보고 싶어요. 그게 배우의 운명인 것 같아요. 이런 욕심을 버리는 순간 게으른 사람이 되는 거죠. 방송국에 가서 선배 대접받고 비슷한 연기를 하면서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걸로 만족하는 배우가 되는 게 너무 싫어요. 그렇다면 저는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유재명이 연기를 그만둘 수도 있다는 말은 연기를 그만두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틀에 박힌 연기를 할 바엔 그만두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가 못 견디는 건 의외성이 조금도 없는, 뻔히 짐작이 가능한, 그래서 재미가 없는 작업, 새롭지 못한 자신일 것이다.
“저는 아직도 카메라 울렁증이 있어요. 20년을 연기한 사람인데도 막상 슛을 들어가면 떨리는 거예요. 그때 알았죠. 내가 이 일을 되게 잘하고 싶어 하는구나, 여전히 설레하는구나. 화려한 배역이나 거창한 작품이 아니라 뭔가 내 마음에 흡족한 변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부지런히 살다 보면 과감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해보니까 돈이 제일 중요하더라, 직장인 같은 연기자가 되어야겠다 할 수도 있고(웃음). 뭐 그럼 그때 다시 선택하면 되죠(웃음).”


유재명은 뜨겁게 고민하는 사람이다.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그랬듯, 자신의 일부를 태워 숯을 만들고, 작품에서 불씨를 받아 활활 타올랐다가 재가 되면 버릴 줄 아는 사람. 매번 내면의 새로운 속살을 찾아내어 숯을 만드니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치열한 고민의 끝에서 그는 변신한다. 새로 태어난다. 새롭게 태어나는 시점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사람, 배우 유재명이다.

202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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