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 시절이 지나자 무수히 많은 동료들이 연극을 그만두고 각자의 진로를 찾아 떠났다. 하지만 유재명은 연극 외의 다른 길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계속한 게 아니라 불안하기 때문에 계속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알 수 없고 불안하니까,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 거죠. 연출을 하고 연기를 하는 동안 연기가 무엇인지, 존재가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뭐랄까, 깊어졌다고 해야 할까요.”
불안함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불안함 속으로 뛰어들어 확실함으로 만드는 것일 테다. 유재명에게는 스무 살에 연극에 입문해서 서울에 올라오던 마흔 살까지 20년간 쌓아 올린 200편에 가까운 작품이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잘 만든 상업극도 있었고, 실수한 연출도 있었지만, 뮤지컬에서부터 실험극까지 정말 다양한 작품과 함께했다고 한다. 그가 연극에 미쳐 있었다는 증거이자 열정적으로 운명을 받아들인 증거, 불안함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증거이자 그의 삶을 대표하는 확실한 데이터다.
“그래서 ‘연극이 아니면 무엇을 하고 싶었냐’는 질문을 받으면 공감이 안 되는 게, 저도 알 수가 없어요. 한 작품을 하고, 다음 작품을 만드는 사이에 모든 것들이 리셋되면서 매번 새롭게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마흔 살, 삶을 리셋하다
유재명은 어마어마한 화력으로 불타오르는 참나무처럼 20년 동안 쉼 없이 작업했다. 그러니 번아웃이 올 만도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태워버려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하나도 남지 않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20대 때부터 해오던 모든 것들, 심지어 자신이 몸담았던 극단도 뒤로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엔 영화배우를 해야겠다거나, 유명해져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새로 태어나고 싶다는 느낌? 새로 시작하려면 시간이나 공간을 바꾸어야 하는데, 부산에서는 도저히 새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그게 저의 패턴인 것 같아요. 지난 의미는 지난대로 두고, 포맷시킨다고 할까요?”
모든 것을 버리니 더 낮은 곳에서 처음부터 밟아가야 했다. 그는 부산 연극판에서 존중받는 연출가이자 배우였다. 잠시 멈추었다가 그 자리에서 시작해도 그만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한 ‘포맷’을 택했다.
“저는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내가 밑바닥이라는 생각도 안 해봤고요. 물론 힘들죠. 돈이 없고, 일을 할 수 없는 괴로움도 있었지만 그걸 불행하다고 느끼진 않았어요. 자기애가 강한 편이라서 제가 선택한 삶에 대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단단한 나무는 기어이 불씨를 머금는다. 재가 아닌 숯이 된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단역과 단역 사이를 전전하며 다시 타오를 날을 기다렸다. 그에게 불씨를 제공한 건 〈응답하라 1988〉의 신원호 PD였다. 유재명은 20년 동안 벼려진 칼이었고, 20년 동안 묻혀있던 숯이었다. 작은 불씨로도 누구보다 뜨겁게 타오를 수 있는 그에게 대중들은 열광했다.
최선을 다해 사투를 벌인 시간의 묶음
“보통 사람들은 터닝포인트를 자신의 의지와 연결을 시키는데 저는 의지를 갖고 애써 터닝포인트를 만든 게 아니었어요. 계속해서 고민하고 불안해하면서도 놓지 않았던 삶에 대한, 생존에 대한 최소한의 태도였어요.”
터닝포인트라는 건 밑바닥을 밟고 뛰어오르는 힘이나 삶의 방향을 틀고 싶은 의지, 성공을 향한 목표에서 나오는 줄 알았다. 유재명에게 터닝 포인트는 목표를 향한 의지의 개념이 아니었다.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깊게 고민하며 내딛는 묵직한 한 걸음이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 첫 번째 고리가 탁 걸리면서 연쇄적으로 작품이 이어졌어요. 〈비밀의 숲〉 같은 경우는 지난 시간의 작업들이 준 선물이죠. 불과 몇 년 전인데 이것도 벌써 장면들이 가물가물해요(웃음). 어떤 작품이나 환경이 주어지면 최선을 다해 사투를 벌이고, 저만의 루틴으로 떠나보내고,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또 헤어지게 되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시간의 묶음이 끝나는 시점이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지금 또다시 그 시점에 와 있는 거죠.”
배우 유재명에게 터닝포인트란 지난 시간을 잘 떠나보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자, 새롭게 시작하려는 용기 있는 사람을 위한 인생의 변곡점일 테다.
배우의 운명, 완전한 변신 “저에게 터닝포인트는 항상 지금이에요. 가능하다면, 모든 걸 다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짜 욕심쟁이죠. 유재명 같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유재명 씨 맞아?’ 싶을 정도로 변신해 보고 싶어요. 그게 배우의 운명인 것 같아요. 이런 욕심을 버리는 순간 게으른 사람이 되는 거죠. 방송국에 가서 선배 대접받고 비슷한 연기를 하면서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걸로 만족하는 배우가 되는 게 너무 싫어요. 그렇다면 저는 굳이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유재명이 연기를 그만둘 수도 있다는 말은 연기를 그만두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틀에 박힌 연기를 할 바엔 그만두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가 못 견디는 건 의외성이 조금도 없는, 뻔히 짐작이 가능한, 그래서 재미가 없는 작업, 새롭지 못한 자신일 것이다.
“저는 아직도 카메라 울렁증이 있어요. 20년을 연기한 사람인데도 막상 슛을 들어가면 떨리는 거예요. 그때 알았죠. 내가 이 일을 되게 잘하고 싶어 하는구나, 여전히 설레하는구나. 화려한 배역이나 거창한 작품이 아니라 뭔가 내 마음에 흡족한 변신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부지런히 살다 보면 과감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해보니까 돈이 제일 중요하더라, 직장인 같은 연기자가 되어야겠다 할 수도 있고(웃음). 뭐 그럼 그때 다시 선택하면 되죠(웃음).”
유재명은 뜨겁게 고민하는 사람이다.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그랬듯, 자신의 일부를 태워 숯을 만들고, 작품에서 불씨를 받아 활활 타올랐다가 재가 되면 버릴 줄 아는 사람. 매번 내면의 새로운 속살을 찾아내어 숯을 만드니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치열한 고민의 끝에서 그는 변신한다. 새로 태어난다. 새롭게 태어나는 시점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사람, 배우 유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