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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127

일러스트레이터 방소담은 1월 27일 태어나 ‘127(일이칠)’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의 일러스트가 흥미롭다. 볼드한 라인, 선명한 색감, 눈을 가린 블랙박스로 더욱 생동감 있게 살아나는 인물들, 동물들, 풍경들이 다채롭다. 잡지의 일러스트, 전시공간 연출뿐만 아니라 NIKE, MCM, LG 등 다양한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tvN ‘유 퀴즈 온더 블럭’ 시즌2의 메인 일러스트레이터로 활약했다. 127 스튜디오에서 127 작가를 만나 영감의 원천에 대해 물었다.
글 _ 배나영

일상 속 작은 디테일을 품은

하루 한 장의 힘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제가 기억하기로는 아주 어릴 때부터 프리랜서가 꿈이었어요(웃음). 하고 싶은 일이 많았거든요. 음악도 하고 싶고, 미술도 하고 싶은데 어딘가에 속해서 일하면 둘 다 하지 못하리라는 걸 어릴 때부터 알았던 것 같아요.”

예체능에 관심이 많던 평범한 아이였다. 흔히들 배우는 피아노를 쳤고, 미술학원에 다녔다. 음악과 미술이 모두 좋았다. 피아니스트인 사촌 언니가 ‘너는 커서 뭘 하고 싶니?’ 물었을 때 ‘프리랜서를 할 거야’라고 답했다. 초등학생치고는 장래희망이 아주 명확한 아이였다. 사촌언니가 ‘프리랜서는 백수’라고 가르쳐 주는 바람에 무척 충격을 받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프리랜서의 꿈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간절히 원하던 프리랜서가 되었다.

“음악이요? 저는 멀티 플레이어가 안 된다는 걸 알았어요(웃음). 프리랜서로 두 가지 일을 다 잘하기에는 제 역량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죠. 하나에 정진하기로 했습니다.”

127 작가가 음악에 조금 더 재능이 있었더라면, 멀티플레이에 능했더라면 우리는 이렇게 다양하고 흥미로운 127만의 작업물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여러 가지를 모두 하고 싶었던 그의 건강한 욕심은 화려하게 움직이는 일러스트로, 다양한 굿즈로 날개를 달았다.





 


하루 한 장씩 그리던 날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모션 그래픽이 하고 싶어서 시각디자인과가 아니라 시각영상디자인과로 진로를 정했다. 대학교를 다니면서는 편집디자인도 하고 싶고, 광고도 하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던 그는, 결국 모든 디자인을 섭렵했다.

3학년을 마치고 1년 동안 휴학하면서 다음카카오에서 인턴 생활도 경험하고, 해외여행을 다녔다. 어떻게 해야 일러스트레이터로 살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하다가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당시 인스타그램에는 일러스트로 유명한 작가들이 이미 많았다. 127은 그들과 차별화를 갖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매일 한 장씩 그림을 그려서 올리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것들로만 그림을 그리면 그리기 쉽죠. 저는 호불호가 굉장히 강해요. 면보다 선을 좋아하고, 가는 선보다 굵은 선을 선호하거든요. 선의 색에 따라 그림의 분위기가 바뀌는데, 검정색 선이 주는 묵직한 분위기를 좋아해요. 흰색이 섞인 원색을 간색이라고 하는데, 원색도 좋지만 간색을 쓸 때의 느낌이 참 좋아요.”

눈에는 127의 트레이드 마크인 블랙박스를 씌웠다. 초기의 일러스트부터 127만의 강렬한 스타일을 엿볼 수 있었다.

“보통 일러스트에서 눈을 묘사하는 방법이 한정적이에요. 사실 점 두 개 찍으면 눈이 완성되잖아요. 표현 방법은 제한적인데 사람들은 눈을 제일 먼저 봐요. 저는 눈 대신 움직임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가 새로운 눈을 만들 자신이 없기도 했고요(웃음).”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알리고 싶어서 꾸준하게 그림을 업로드했다. 완벽한 그림을 완성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일단 하루에 한 장씩 올리기로 한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여행을 가서는 그릴 시간이 없어서 그날 찍은 사진 위에 표현하고 싶은 오브제를 그려서 올리기도 했다.

“하루 한 장 그리기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지나니까 여기저기서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여행 사진 위에 그린 그림도 의외로 반응이 좋았고요. ‘유 퀴즈 온더 블럭’의 감독님도 그 그림을 보시고 연락을 주셨어요.”

127 작가는 어느 날 갑자기 방송을 타고 유명해진 게 아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그리고, 연습하고, 부족함을 깨달으며 또 그리고, 그렇게 쌓아올린 자신만의 포트폴리오가 있다. 꾸준함의 힘은 이렇게 세다.


어렵지만 즐기고 도전하고 성장하기

“저는 지금도 인물을 그리는 게 어려워요. 우리는 매일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인물 일러스트는 조금만 이상해도 대중들이 바로 눈치를 채거든요.”

127의 일러스트에는 대부분 활동적인 인물이 담긴다. 요가를 하거나 서핑을 하고, 걷고 뛰고 움직인다. 인물에 자신이 있어서 인물을 그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람을 그리는 게 너무 어려우니까 사진을 많이 참고하고, 사진에 대고 그려보기도 했어요. 이 과정이 저에겐 참 중요했어요. 연습하다 보니 그리고 싶은 포즈가 떠오르고, 더 공부하게 되고,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움직이는 인물 사진을 모으고, 관절과 뼈를 설명해주는 책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던 중에 ‘나이키(NIKE)’에서 작업 의뢰를 받았다. 





“인물을 그리는 것도 어려운 데, 움직이는 인물을 그려달라는 거예요. 팔을 들어 올리는 표현에도 기본으로 3컷이 필요해요. 컷당 속도를 어떻게 주느냐에 따라서 느낌도 달라지고요. 애니메이션 작업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꼭 해보고 싶었어요. 덜컥 맡았죠.”

축구공을 차는 그림을 그리려면 공이 회전하는 모습까지 디테일을 잡아줘야 했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아무도 모르고 넘어가지만 어색한 움직임은 누구나 알아채기 때문이다. 소소한 디테일까지 모두 꼼꼼하게 작업한 결과 클라이언트는 매우 흡족해했다. 이후 ‘유 퀴즈 온더 블럭’의 영상 작업이 이어졌다. 매 순간이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었다.

“일을 하면서 제가 많이 성장했다고 느껴요. 어려운 작업을 의뢰받으면 ‘내 실력을 늘려주려고 이런 일을 다 맡겨주시네’라고 생각해요(웃음). 그래서 이후에 ‘MCM’이나 ‘쓱데이’와 작업을 할 때는 확실히 수월했어요.”


터무니없는 꿈도 현실로 그려내기 

“저는 일상에서 아주 작고 사소한 모습을 캐치하고 싶어요. 쉽진 않지만 그래도 세심하게 포인트를 잡아내는 게 좋아요.”

해질녘 건물에 비치는 빛을 보면서 색감을 연구하고, 자주 지나다니는 두무개 다리를 인물의 배경으로 그려 넣는다. 비가 너무 많이 올 때는 분명 누군가 구름 위에서 스위치를 누르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림으로 표현한다. 작년에 아저씨와 강아지가 함께 산책하는 모습을 그렸다면, 올해는 아저씨와 강아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산책하는 모습을 그린다. 일상의 작은 풍경들이 그림이 된다.

“지금은 스스로를 더 다져야 할 시기인 것 같아요. 잘 다지면 앞으로 더 성장할 거 같은 느낌도 들고요.”
쟁쟁한 기업들과 콜라보를 하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축할 만도 한데, 오히려 자신을 잘 다져야 할 시간임을 안다. 참 야무진 아티스트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영화 〈무드 인디고〉의 미셸 공드리 감독을 한 번 만나보는 게 꿈이었거든요. 앞으로도 이런 꿈들을 잃지 않으면 좋겠어요. 터무니없이 커 보이지만 그렇게 터무니없는 꿈은 아니잖아요. 그 사람도 지구인인데(웃음)!”

127은 저 높은 곳에 자신의 꿈을 걸쳐 둔다. 그리고 현실에 놓인 자신을 더 단단하게 다진다. 바닥을 잘 다지면서 쑥쑥 성장하다 보면 높은 꿈에 손이 닿을 만큼 자랄지도 모른다. 언젠가 127 작가가 칸 영화제 포스터를 작업하면서 미셸 공드리 감독을 만나게 될지, 그야말로 모를 일이다. 아마 127은그때도 하루에 한 장씩 자신의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20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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