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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건축가 김진애 박사

김진애 박사의 경력은 화려하다. 서울대 공대 800명 동기 중 유일한 여학생, MIT 건축 석사와 도시계획 박사, 《타임》지가 선정한 21세기 리더 100인 중 유일한 한국인이다. 《왜 공부하는가》 《한번은 독해져라》 《여자의 독서》를 비롯해 1년에 한 권씩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써온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TV 프로그램 〈알쓸신잡〉 세 시즌을 통틀어 유일한 여성 박사다. 이토록 다양한 경력에도 여전히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공부하는 걸 즐긴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더 궁금해지는 이 시대의 보기 드문 어른이다.
글 _배나영 / 사진 _ 장서우

배우고 일하고 성장하라



 

멀티플레이어의 시간 관리

“방송에서도 제가 유학 중 한 아이는 안고, 한 아이는 업고 힘들게 공부를 했다는 걸 강조하더라고요. 아니, 〈알쓸신잡〉 너마저! 굉장히 쿨한 프로그램인 줄 알았는데 전통적인 클리셰(진부하거나 틀에 박힌 생각 따위를 이르는 말)에 빠져서 나를 그런 식으로 포장하다니(웃음)!”
여전히 사람들이 묻는다. 그 시절 유학까지 다녀온, 《타임》지에서도 손꼽는 세계적인 인물도 공부와 육아를 병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웠겠냐고. 전통적인 클리셰를 딱 질색하며 살아온 김진애 박사답게 쿨하게 답한다. 닥치면 다 하게 되어있다고. 세상 사는 일은 다 어려운 법이고, 어려운 일이 없으면 세상에 재미가 없다고.
김진애 박사는 철저하게 육아와 가사를 절반으로 나눴다. 월수금, 화목토로 나눠 배우자와 자신만의 시간을 확보했다. 공부를 하든 친구를 만나든 내 시간, 나가서 일해도 내 시간, 심지어 집에서 그냥 쉬어도 내 시간이었다. 김진애 박사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엄살하지 않았다. 공부에 몰입하듯이 일을 할 때도, 육아를 할 때도 집중했다. 아이가 잘 때 함께 자고 새벽에 일어났다.
“정확하게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큼인지 알아야 여러 가지를 계획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계속 눈치를 봐야 하고 끌려 다니게 됩니다. 대신 독하게 실천해야 하죠.”
요즘도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에너지가 가장 충만한 시간이다. ‘김진애너지’의 원동력이다.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공부

공부라면 독보적이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왜 공부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책을 한 권 쓸 정도다. ‘자라자, 배우자, 평생토록!’이라는 좌우명에도 공부에 대한 관심이 명확하다.
“논문을 한 번 써보면 주제를 잡는 게 제일 어려워요. 학위 논문을 써봤다는 건 다른 게 아니라 하나의 의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봤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나에게 남아요.
그 경험이 남는 거지 지식이 남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공부를 많이 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해봐야 해요.”
김진애 박사가 말하는 공부란 학위를 따는 것만이 아니다. 프로젝트 전체를 꿰뚫는 시각을 갖는 걸 말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 중요하다.
“저에게는 논문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과정이 될 수 있겠죠. 어떤 프로젝트를 맡는다면 처음부터 기획하고, 실행하고, 끝까지 해서 성공하고, 실패까지 해봐야 해요. 완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해본 사람과 안 해본 사람의 차이는 굉장히 큽니다.”


지식이 아닌 통찰력을 쌓아야

김진애 박사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해내고, 그에 대한 평가를 받는 과정을 세 번만 경험해보면 세상에 무서울 게 없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훈련’이다.
“공부는 절대로 지식과 관계가 없어요. 물론 지식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진짜 공부는 통찰력을 키우는 겁니다. 무슨 일을 하든 전체의 맥을 짚으면서 빠진 부분을 확인하고 더 채워 넣어야 해요. 전체적인 그림이 자꾸 보여야 진짜 공부죠.”
개미는 개미굴을 파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개미굴을 파기만 하면 안 된다. 개미굴을 파면서 자신이 개미굴을 파고 있다는 사실을 조망하고, 왜 파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 개미굴을 파고 있는지 아닌지, 개미굴을 왜 파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단계, 그게 일을 즐기는 단계예요.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조감할 수 있어야 즐길 수 있어요. 그러면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할 때도 배울 게 생기죠.”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말이 맞는가 싶어 걱정하던 참이었다. 기우였다. 김진애 박사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거예요!”라고.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 을이 돼요.
세상을 설득하고, 세상을 바꿔 나가는 일은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일을 통해 성장하는 을(乙)

직장에 다니다 보면 싫든 좋든 개미굴을 파야 할 때가 있다. 을(乙)의 숙명이다. 김진애 박사도 건축을 전공하고 도시를 계획하는 동안 을로서 일했다. 건축은 자본과 권력, 도시계획과 건축주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건축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을’로서 일하는 고충을 토로한다. 하지만 긍정 에너지로 충만한 김진애 박사는 오히려 ‘을’이어서 좋은 점을 꼽는다.
“모든 사람은 어느 순간 을이 됩니다. 갑으로만 살 수 없어요. 을이 된다는 건 돈의 문제만이 아니거든요.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 을이 돼요. 세상을 설득하고, 세상을 바꿔 나가는 일은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스티브 잡스도 을 아니었나요?”
을의 경험은 누군가에겐 그저 하루를 망친 기억이지만 누군가에겐 평생을 좌우할 성장의 밑거름이다. 을의 위치에서 세상을 설득하는 경험이 우리를 더 큰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배우고 성장하기

“요즘 텃밭을 가꾸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달아요. 3년쯤 텃밭 공부를 하고 나니까 이제야 노련한 농사꾼이 됐죠. 강아지를 키운 지 20년쯤 되니까 죽음과 가까워지는 법을 알게 됐고요. 관계에 대한 공부도 하고요. 정말 죽을 때까지 배웁니다.”
요즘엔 무슨 공부를 하나 궁금했는데 ‘텃밭 가꾸기’와 ‘반려견 키우기’라는 대답이 돌아와 놀라웠다.
“물론 건축과 도시가 제 전공이니까 한참 동안 이상적인 도시에 심취해서 엄청나게 공부한 적도 있고, 사회주의에서 말하는 도시 이론, 성곽 도시에 관련된 이론에 빠진 적도 있죠. 민영화, 권력, 자본 등 나름의 주제를 잡아 끊임없이 공부해요. 하지만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 수 있는지도 생각합니다.”
김진애 박사는 공부 주제를 스스로 선택하되 여러 가지 주제를 동시에 공부하라고 당부했다. 어떤 주제는 3년 정도 공부해야 하겠지만, 어떤 주제는 단 1년이면 충분하고, 어떤 주제는 10년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여러 가지 주제를 갖고 있으면, 살아가는 동안 굉장한 힘이 됩니다. 머릿속에 주제별로 서랍을 만드세요. 바쁘면 어렵겠지만, 나중에 언제든 열어볼 수 있겠죠. 자신만의 프로젝트가 생기면 세상의 주체가 나라는 사실이 느껴져서 좋습니다.”
자신만의 주제를 잡아 공부하는 사람은 여러 방면으로 성장한다. 성장을 멈추지 않는 사람은 삶과 맞닿은 모든 것에서 배움을 시작한다. 진정한 어른은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이 아닐까? 김진애 박사는 진정 닮고 싶은 어른이었다. 

 

 

2019-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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