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공감

스페인 세비야

글 _ 박진배(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학교 명예석좌교수)

태양의 나라,
열정의 스페인




스페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작렬하는 태양과 광활한 평야, 맛있는 음식과 와인 등이다. 이외에도, 플라밍고나 투우, 축제, 그리고 문학의 전통이 탄탄해서 지역에 따라, 취향에 따라 색다른 형태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스페인의 정신
스페인을 대표하는 스포츠 중 하나가 바로 투우다. 투우는 흔히 ‘스페인의 정신’으로 표현된다. 스피드, 용기, 기술, 그리고 동작의 우아함은 하나의 퍼포먼스를 넘어 매혹 자체로 다가온다. 인간이 자연의 거대한 힘에 도전하는 정신이 투우의 바탕이므로 투우에서 소가 이기는 법은 없다. 투우는 종교적인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스페인 사람이 아니면 투우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다. 오랜 역사를 가진 투우는 18세기에 가장 성행했는데,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의식이었다. 투우는 수많은 스페인의 문학에 등장하고 그림도 많이 그려졌다. 피카소와 고야도 자주 선택했던 소재다. 



세비야의 투우장(Real Masetranza de Caradellia de Sevilla)은 1670년 지어져 무려 35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건물이다. 이곳의 기록실에는 6백여 점의 투우 그림과 포스터가 보관되어 있다. 초기에는 투우를 홍보하고자 그림을 사용하였으나, 석판화의 발명 이후에는 포스터가 보편화되었다. 포스터에는 날짜와 시간, 규칙 등이 다양한 글씨체로 적혀있고, 경기장의 분위기와 피 흘리는 소의 모습, 붉은 천, 주역 투우사인 마타도르(Matador)의 순간 동작 등이 묘사되어 있다. ‘옷을 끝내주게 잘 입었다’는 뜻의 영어 ‘드레스드 투 킬(Dressed to Kill)’을 직역한다면 아마도 투우사에게 가장 잘 적용되는 표현이 아닐까?


*세비야의 투우장에 전시된 포스터


돈키호테의 흔적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은 《돈키호테》다. 1605년 ‘미겔 데 세르반테스’에 의해서 탄생한 《돈키호테》는 괴물이나 기사, 왕국과 같은 은유에 독창적 발상이 더해져 엉뚱함과 아이러니, 과장과 유머의 상징으로 수백 년간 전해져왔다.
회화, 뮤지컬, 영화로도 계속 만들어지고, 스트라우스의 교향시로도 작곡되었으며, 밍쿠스의 발레 작품으로도 자주 공연됐다. 방대한 분량 때문에 완독한 독자는 많지 않지만 어린이용 문고판만으로도 줄거리와 풍차 에피소드는 다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덕분에 스페인 라만차 지역 ‘콘 수에그라(Con Suegra)’ 마을 언덕에 위치한 풍차는 명소가 되었다. 방문객들은 풍차를 가까이서 보고 괴물을 향해 돌진하던 돈키호테를 상상한다.



돈키호테는 우리에게 정의, 사랑, 품위, 그리고 이상과 비전을 말해 준다. 하지만 이 소설을 사람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바로 돈키호테와 같은 캐릭터가 우리 주변에 꼭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 존재하는 인물이 실감 나도록 소설에서 잘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미워할 수 없는 이 슬픈 기사는 다른 문학과 드라마를 통해서도 수 없이 재탄생되었다. 심지어는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같은 작품들 속에서도 이런 캐릭터가 꼭 포함된다. “돈키호테 이후의 소설은 이 소설을 다시 쓰거나 그 일부를 쓴 것”이라던가 “미래의 작가들이 쓰고 싶은 내용을 수백 년 전에 다 써 놓았다”는 표현들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나와 가까운 누구의 이야기고 현실의 이야기고 인생의 이야기다.



재료와 불, 그리고 자연의 맛
빵모자를 즐겨 쓰고, 고유 언어를 사용하는 스페인의 ‘바스크(Basque)’ 지방. 면적 대비 미쉐린 별이 가장 많다는 ‘산 세바스찬(San Sebastian)’은 식도락가들의 성지다. 이 지방에 ‘아사도 에체바리(Asador Etxebarri)’라는 독특한 레스토랑이 있다. 오너 셰프가 헛간을 사서 개조해 1990년 문을 연 곳이다. 셰프의 어린 시절 이곳엔 전기도 가스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할머니는 매일 장작을 때서 요리를 해 주었다.
자연스럽게 불에 관심을 가졌고, 훗날 목수가 되면서 다양한 나무에 대한 식견을 갖추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는 어느 재료를 어느 나무에 어느 온도로 얼마 동안 구워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메뉴는 매일 신중하게 고른 계절 음식을 여러 종류의 장작으로 구워 내는 것이 전부다.


순서대로 열다섯 가지의 음식이 나온다. 염소 버터, 물소 모차렐라 치즈, 석화, 닭새우, 백삼, 완두콩, 농어 턱살, 꼴뚜기, 거북손, 새끼 양고기 겨드랑이 살 등이다. 버터와 치즈는 자신이 직접 키우는 염소와 물소에서 짠 우유로 만든다. 바르셀로나의 북부해안에서 잡힌다는 닭새우를 뜯자 싱싱해서 방금까지 뛰다가 멈춘 듯 선홍색 심장이 선명하다. 생선에서 최고 맛있다는 턱 밑 살, 새끼양의 가장 보드라운 겨드랑이 부분까지 음식은 감동의 연속이다. 모든 재료는 각기 다른 나무 장작으로 지핀 불에서 다른 온도 속에 있다가 테이블로 전달된다. 맛의 깊이가 끝이 없다.
그의 요리철학은 ‘재료와 불, 그리고 내 주변의 자연’이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겸손한 셰프’로 알려져 있다. 매일 아침 여덟 시부터 장작을 준비하고 주방에서 직접 재료를 구워 왔다. 하루를 기꺼이 할애해서 시골구석에 있는 자신의 레스토랑을 찾아오는 손님에 대한 예의라고 한다.

하몬이 맛있는 계절

세계 미식의 유행인 스페인의 햄 ‘하몬(Jamon)’은 이베리아반도 남서부 지역에서 만들어진다. 다리 부분이 검은 이베리코 품종 돼지는 종자부터 먹는 음식까지 철저하게 관리된다.
늦가을부터 다음 해 봄까지 도토리, 나무껍질, 솔방울, 버섯 등 자연에 있는 것만 먹어야 하고 사료를 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베리코 하몬 데 베요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베요타(Bellota)’는 스페인 말로 ‘도토리’다. 자유로운 돼지는 맛있는 고기가 된다.


하몬을 만드는 데는 두 가지 재료가 필요하다. 좋은 소금과 바람이다. 생고기는 소금을 덮은 후 냉장 창고에 보관한다. 염장 후에는 천장에 매달아 이삼 년 정도 건조 시킨다. 농장 주인은 “좋은 돼지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늦가을은 하몬이 아주 맛있는 계절이다. 얇게 잘린 하몬 조각은 반짝거리고, 손등에 놓으면 체온에 녹아 투명해진다. 입에 넣는 순간 침샘이 찌릿하게 반응하며 기분 좋은 흙냄새와 견과류, 꽃향기의 풍미가 가득 퍼진다. “하몬이 다른 햄들과 뭐가 그렇게 다르냐?”는 질문에 아주 간단한 대답이 돌아온다. “완전히 다르다.”

2023-11-01

박진배 :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학교 명예석좌교수다. 인테리어디자이너로 서울의 ‘민가다헌’ 뉴욕의 ‘프레임 카페’와 ‘곳간’을 디자인했다. 저서로는 《천 번의 아침식사》 《공간미식가》 《뉴욕 아이디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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