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CINEMA

가상과 현실의 혼돈 〈레디 플레이어 원〉

글 _ 정현목(중앙일보 기자)


 

때는 바야흐로 2045년. 세상은 잿빛이다. 도시는 활력을 잃었고, 사람들의 표정 또한 우울하기 그지없다. 2018년 개봉한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그려낸 현실은 이처럼 암울하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가상현실 오아시스(OASIS)를 도피처로 삼는다. 아니, 오아시스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곳에선 누구든 원하는 캐릭터로 변해 뭐든지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

상상하는 모든 게 이뤄지는 꿈같은 공간이다. 증강현실 게임의 형태로 시작된 오아시스는 증강현실과 가상현실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에 힘입어, 현실을 대체하는 대안적 세계가 됐다. 수요가 있으면 기술 발전이 따르는 법. 비루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탈출해, 또 다른 내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오아시스인 셈이다.
사람들은 오아시스에서 게임만 즐기진 않는다. 다른 플레이어들과 교류하고, 휴가도 즐기고, 일도 한다. 오아시스에서 통용되는 가상화폐는 현실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사실상 식사와 수면, 용변을 제외한 모든 행위를 오아시스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원작 소설에선 학교 교육마저 오아시스 안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고 한다.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흐릿해지다가, 결국 뒤바뀌어 버린 주객 전도의 일상. 영화 속 사람들의 삶이다.

오아시스가 삶의 유일한 낙이 된 건, 주인공 웨이드(타이 쉐리던)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사는 곳은 미국 오하이오주의 한 빈민촌. 한때 미국 제조업의 중심이었지만,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고 IT 붐이 일면서 쇠락해버린 오하이오주를 배경으로 삼은 게 의미심장하다.

웨이드는 비루한 현실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파시발이란 이름으로 오아시스에 접속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그곳에서 웨이드는 더 이상 빈민촌의 루저나 천덕꾸러기가 아니다. 유명한 플레이어로 활약하며, 친구들도 사귄다. 가상공간에서 ‘인싸’ 대접을 받는 화려한 인물이 정작 현실에선 ‘아싸’인 경우가 많은 법. 웨이드 또한 그렇다.

어두운 현실과 꿈같은 가상공간을 오가던 웨이드에게 어느 날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오아시스의 창시자인 괴짜 천재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가 자신이 오아시스 곳곳에 숨겨놓은 세 개의 미션을 통과한 이에게 막대한 유산과 함께 오아시스의 소유권을 양도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1980년대 대중문화 속에 단서가 있다는 불친절한 힌트를 남긴 채.

그러자 웨이드를 포함한 많은 플레이어들이 할리데이의 ‘이스터에그’를 찾기 위해 오아시스 안에서 각축을 벌인다. 웨이드가 첫 번째 수수께끼를 푸는데 성공하자, 대기업 ‘IOI’도 오아시스의 경영권을 얻기 위해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투입해 경쟁에 뛰어든다. 여기서 IOI는 오아시스와 연동되는 수트 아이템 등 가상 · 증강현실 기기를 판매하는 기업인 동시에, 가상세계에 빠진 사람들을 착취해 이윤을 남기는 악덕기업의 면모를 갖고 있다.

IOI의 수장 놀란 소렌토(벤 멘델슨)는 사병까지 거느리며, 돈을 벌기 위해 불법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신용불량자가 된 게임 폐인들을 납치해 노역을 시키고, 오아시스를 차지하는데 걸림돌인 웨이드와 그 친구들을 제거하기 위해 폭탄을 설치, 무고한 시민들을 살상한다. 가상현실의 팽창에 의해 뒤집어진 세상에서 나타날 수 있는 거대 기업의 독점과 전횡, 빈부격차 심화 등의 문제를 IOI라는 악덕기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런 가운데 웨이드는 IOI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까? 〈레디 플레이어 원〉은 이처럼 한 소년의 성장기를 담은 SF 어드벤처 영화지만, 가상 · 증강현실을 영화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영화다. 영화는 가상 · 증강현실 공간에서 구현되는 또 다른 세상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실체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사실적인 홀로그램 기술도 선보인다.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게 된 가상세계의 부작용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 모든 걸 쏟아부은 게임에서 패배해 돈과 아이템을 모두 잃고 파산하거나, 게임에서 진 빚이 현실로도 이어져 강제 노역에 처해지는 상황이 섬뜩하게 그려진다. 새 집을 사려고 모아둔 돈까지 게임 아바타를 사는데 쏟아붓는 웨이드 이모의 남자친구 또한 그런 결말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가상세계의 아이템 경쟁이 현실에서의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우리 주변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다.

오아시스 같은 가상공간에서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현실의 산적한 문제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고, 암울한 현실을 피해 온 그곳도 현실세계의 모순이 그대로 투영된 또 다른 디스토피아일 수 있다. 가상공간을 배척하진 말되, 현실세계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 살아가야 한다는 스필버그 감독의 메시지가 큰 울림을 갖는 이유다.

201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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