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 세계사

그리스 아테네

역사는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 바친 수많은 영웅의 이야기로 가득하죠. 하지만 민주주의의 단초가 되었던 최초의 영웅은 정작 민주주의의 ‘민(民)’자도 의도할 생각이 없었다고 하는데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가 어떤 분노 덕분에 시작되었다는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별안간 민주주의의 영웅이 되어버린 연인의 이야기를 들으러 아테네로 떠나볼까요?
글 _ 이주은(책 《스캔들 세계사》의 저자)

사랑이 꽃피운
민주주의



감히 네가 날 거절해?

만약 만약 여러분이 사랑하는 연인과 알콩달콩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엄청난 힘을 가진 권력자가 나타나 내 연인을 노린다면 어떨까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연인을 빼앗으려 한다면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을 텐데요.

기원전 514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소년 ‘하르모디오스’와 그의 남성 연인, ‘아리스토게이톤’의 연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저 행복하기만 했던 둘의 사이, 그런데 어느 날부터 누군가 끼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아테네의 참주였던 ‘히파르코스’가 하르모디오스에게 치근덕거린 것이죠. 여기서 참주란, 비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해 독재를 행사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히파르코스는 형제인 ‘히피아스’와 함께 아버지로부터 참주 자리를 물려받아 아테네를 다스리고 있었죠. 정치보다 예술과 문학을 추구하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 나가던 히파르코스는 어느 날 하르모디오스를 발견하곤 조각 같은 그의 미모에 반해버렸습니다.

히파르코스는 하르모디오스를 수차례 유혹했지만, 하르모디오스는 연인인 아리스토게이톤이 있었으니 그를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히파르코스는 계속되는 거절에 화가 잔뜩 났죠.

하지만 대놓고 하르모디오스를 괴롭힐 수 없었던 히파르코스는 대신 그의 여동생을 모욕하기로 합니다. 히파르코스는 하르모디오스의 여동생을 불러 한 행렬에서 꽃바구니를 들도록 시켰습니다. 그러다가 대뜸 ‘넌 처녀가 아니니 자격이 안된다’며 공개적으로 쫓아내 버렸죠. 짓밟힌 여동생의 명예에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복수심에 가득 찬 그들은 결국 히파르코스를 살해하기로 마음 먹었죠.





꿈자리가 사나웠던 이유

그로부터 얼마 후, 아테나 여신을 기리는 판아테나이아 축제의 전날 밤 히파르코스는 어떤 꿈을 꿉니다. 한 사람이 나타나, “견디기 힘든 고난을 겪더라도 사자의 강인한 심장으로 이겨내라. 무릇 죄를 짓고 그 벌을 벗어나는 자는 없나니”라는 말을 남기곤 사라지는 꿈이었죠. ‘견디기 힘든 고난’이란 말을 들은 히파르코스는 불안해했지만 이내 잊고 축제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히파르코스는 축제에 나서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축제는 무기를 소지하는 것이 허용됐기 때문이죠.


히파르코스가 축제에 참여한 모습을 본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은 품속에 칼을 숨긴 채 히파르코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곤 히파르코스가 잠시 호위병과 떨어진 사이 곧장 달려들어 칼로 공격했죠. 히파르코스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하르모디오스도 달려온 호위병에게 살해당했으며, 아리스토게이톤 역시 붙잡혀 고문을 받던 중 형제의 죽음에 분노한 히피아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죠.

갑자기 영웅이 되어버렸다
히피아스는 이 사건이 그저 치정극으로 기억되길 바랐지만 아테네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히파르코스를 권력을 남용한 폭군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죠. 민심을 잃은 히피아스는 수많은 아테네 사람들을 처형하고 추방하며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피로 물들어버린 권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답니다.
약 4년 후, 히피아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아테네에서 추방당합니다. 참주가 없어진 아테네에서는 민주주의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죠. 사람들은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의 조각상을 아테네의 중심부인 아고라에 세워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아테네 시민들도 히파르코스의 암살이 민주주의를 위한 정의감이 아닌 사심 담긴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폭군을 죽이기 위해 목숨 바친 연인’이라는 이야기는 서사시의 소재가 되기에 완벽했고, 마침 아테네는 사회적 혼란을 잠재울 구심점이 필요했기에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을 독재자를 없앤 영웅이자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승화했던 것입니다.

 


아테네의 중심을 당당히 지키던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의 조각상은 오랜 시간이 지나 없어졌지만 복제품은 여러 점 남아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이탈리아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도 일부를 소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흔적은 이탈리아와 미국에서 여전히 찾아볼 수 있죠. 물론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으니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을 매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2022-08-01

이주은: 포털 사이트에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며 ‘동화보다 재미있는 세계사’로 주목받았다. 현재는 방문자 600만 명의 파워블로그와 ‘눈숑눈숑 역사탐방’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스캔들 세계사》 시리즈와 《개와 고양이에 관한 작은 세계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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