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 세계사

미국 보스턴

지진, 태풍, 화산 폭발 등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재난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달콤한 당밀이 도시를 휩쓰는 재난을 상상해 보셨나요? 그저 동화책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일이 약 백 년 전, 미국 보스턴에서 실제로 일어났답니다.심지어 그 파괴력이 어마어마했죠.
글 _ 이주은(《스캔들 세계사》의 저자)

하늘에서
당밀이 쏟아진다면




당밀이란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만들 때 추출되는 고동색의 찐득찐득하고 달콤한 액체를 말합니다. 빵과 구두약, 럼주의 재료로 쓰이는데요. 이런 당밀이 홍수처럼 몰아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보스턴에서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데요. ‘미국의 아테네’라고 불리는 매력적인 문화도시 보스턴에 몰아쳤던 당밀 홍수는 대체 어떻게 일어난 걸까요?
 



도시의 평화를 깨뜨린 굉음

때는 1919년 1월 15일, 평소보다 따뜻했던 날씨에 사람들은 모처럼 야외활동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오후 12시 40분 즈음이었을까요? 점심을 먹고 한가로이 햇볕을 쬐던 사람들의 귀에 별안간 희한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탕! 타탕! 탕탕!” 깜짝 놀란 사람들은 소리가 난 북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곳엔 화학 관련 회사인 퓨리티 디스틸링사의 높이 15m, 지름 27m 되는 거대한 당밀 탱크가 있었죠. 탱크 속에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수입한 당밀이 가득 담겨 팔려나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기관총에서나 날 법한 소리가 당밀 탱크에서 난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사람들이 당황하는 사이, 탱크를 고정하던 대부분의 나사들이 갑자기 총알처럼 날아가 버렸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양면이 무너져 내리며 1만 4천 톤의 당밀이 해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만 4천 톤의 당밀은 무려 약 8m 높이의 파도를 만들며 엄청난 속도로 몰아쳤습니다. 지나가는 곳에 있던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기세였죠. 사람, 말, 개, 고양이 할 것 없이 모두 끈적끈적한 당밀에 휩쓸렸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이 사고로 결국 21명이 목숨을 잃고 150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닦아도 닦아도 닦이지 않는

밤새도록 사람들을 구조한 후 남은 건 1만 4천 톤의 당밀을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옷에 묻어 굳어버린 꿀 한 방울도 닦기 힘든데, 당밀이 온 동네를 뒤덮었으니 정말 엄청난 골칫거리였겠죠?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당밀을 치우기 위해 물을 쏟아부으며 매달렸지만 당밀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보스턴시는 소방선을 동원해 당밀 위에 소금물을 부어 모래로 박박 문질렀고, 그제야 당밀이 조금씩 닦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끈적했던 당밀은 사람들의 손, 머리카락, 옷자락과 신발에 쩍쩍 들러붙었고, 이 광경을 구경하러 왔던 사람들이 당밀을 옮기며 보스턴 전역으로 퍼져 나갔죠. 결국 보스턴의 모든 것이 끈적거리고 끔찍한 단내를 풀풀 풍기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도시가 당밀로 가득했는지 사건이 일어난 근처의 찰스 강에는 한동안 당밀과 같은 고동색 물이 흘렀답니다.

 

그래서 원인이 뭔데?
극심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퓨리티 디스틸링사를 상대로 피해 보상 소송을 걸었고 법원은 회사가 주민들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고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했죠. 기온이 너무 올라서, 당밀을 너무 가득 채워서, 당밀이 발효가 돼서, 사람들은 다양한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조사에서 드러난 사고 원인은 만든 지 4년밖에 되지 않은 탱크였습니다. 회사는 높이 15m의 거대한 탱크를 만들면서도 마감 날짜를 맞추겠다며 서두르느라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았고, 새는 부분이 없는지 검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감독관은 설계도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죠. 즉 날림 공사, 무시된 안전 수칙, 자격 미달 인력 등 제대로 돌아간 부분이 하나도 없었던 셈입니다. 어찌 보면 탱크가 4년이나 버틴 것이 신기할 지경이네요. 이 사고로 안전 수칙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낀 시의회는 이후 보스턴에서 행해지는 모든 건축과 공사에 건축가와 엔지니어가 반드시 참여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고 이 법은 곧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당밀은 단내를 남기고

사태가 그럭저럭 마무리된 뒤에도 보스턴 이곳저곳에 당밀의 냄새가 아주 오랫동안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여름이면 더욱 심해지는 지독한 단내에 사람들은 몸서리쳤습니다. 보스턴의 어르신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름이면 당밀의 냄새가 희미하게 난다고 말하기도 하죠.

이 사건은 보스턴 시민들과 여행객들에게 ‘커머셜 거리’의 작은 표지판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자그마한 초록색 표지판에 빼곡히 적힌 글을 읽다 보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당밀 홍수 사건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답니다. 다 읽고 나면 한 번 숨을 크게 들이마셔보세요. 어디선가 살포시 스치는 당밀 냄새를 맡을지도 모르니까요!
 

 

2022-07-01

이주은: 포털 사이트에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며 ‘동화보다 재미있는 세계사’로 주목받았다. 현재는 방문자 600만 명의 파워블로그와 ‘눈숑눈숑 역사탐방’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스캔들 세계사》 시리즈와 《개와 고양이에 관한 작은 세계사》 등이 있다.

WORK > JUMP UP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기

    최상단으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