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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 스릴러 〈너브〉 속 ‘블록체인’

글 _ 정현목(중앙일보 기자)



영화 〈너브(2016, 헨리 유스트 · 아리엘 슐만 감독)〉는 한마디로 10대 취향의 테크노 스릴러다. 첨단 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며, 보는 이의 가슴을 졸이게 만든다. 영화는 틴에이저들을 타깃으로 한 만큼 현란하고 스피드한 전개를 보여주지만, 현대사회의 그늘과 병폐를 까발리는 묵직한 한 방 또한 놓치지 않는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너브’는 자극적인 미션을 수행할수록 팔로워 수가 늘어나는 10대들의 SNS 미션수행 사이트다. 미션을 수행하는 플레이어(player)와 이들에게 미션을 주고 미션의 성공 여부에 베팅하는 왓쳐(watcher), 두 그룹이 소통하는 비밀 공간이다. 플레이어가 주어진 미션을 성공하면 왓쳐가 늘어나고 상금 또한 단계별로 높아진다. 이같은 24시간 라이브 게임이 펼쳐지는 ‘너브’에서 플레이어의 모든 사생활과 정보는 실시간으로 왓쳐들에게 노출되지만, 왓쳐들은 철저히 익명성이 보장된다.

대학 입학을 앞둔 주인공 비(엠마 로버츠)는 소심한 성격에서 벗어나 일탈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에 ‘너브’에 가입한다. 왓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파트너 이안(데이브 프랭코)과 함께 수행하는 미션들은 점점 수위가 높아져간다. 처음 보는 남성과 5초간 키스하기, 고가의 드레스 입고 백화점 탈출하기 등은 기초 수준에 속한다. 고층 건물 사이를 사다리 타고 건너기, 고층건물 크레인에 매달리기 등 미션은 점차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도박으로 변질돼 간다.

의도한 대로 짜릿한 일탈을 맛본 비는 미션에 성공할수록 점점 대담해지고 엄청난 상금을 획득하며 온라인 스타가 된다. 하지만 갈수록 자극적이고 위험해지는 미션을 보다 못해 경찰에 신고한다. 그리곤 ‘밀고자’ 그룹에 속해져 극도로 위험한 미션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함정에 빠진다. 범죄 행위도 서슴지 않는 플레이어들과 이를 부추기는 왓쳐들의 행태는 ‘좋아요’ ‘별풍선’을 하나라도 더 받기 위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콘텐츠를 양산해내는 소셜미디어의 오염된 생태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외에도 영화는 매우 흥미로운 점을 짚어낸다.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하면서 부각되고 있는 블록체인이다.

영화 중반부에서 주인공의 친구 토미(마일즈 헤이저)가 해커들과 함께 ‘너브’의 서버를 다운시키려 하는데, “너브 게임은 참여자 한 명 한 명이 모두 서버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서버를 다운시키는 건 불가능하다”라는 말과 함께 포기한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장면은 아니지만, 4차 산업혁명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 시사하는 바는 크다. ‘너브’ 게임 서버의 원리가 블록체인의 원리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블록체인은 중앙 집중형 서버에 기록을 보관하지 않고 개개인의 참여자(노드)가 서버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부 노드가 해킹 당하더라도 다수의 노드들에 데이터가 남아있어 지속적으로 데이터를 보존할 수 있다. 이는 영화 속 ‘너브’의 서버가 다운되거나 해킹 당하지 않는 이유와 비슷하다. 유저 데이터를 보관하는 데이터 센터가 따로 없는 대신, 신규 가입하는 유저의 모바일 디바이스가 새로운 서버가 되는 ‘너브’ 게임. 할리우드의 IT 칼럼니스트들이 이 영화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에 기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 핵심적인 이유다.

영화 말미에 토미의 활약으로 ‘너브’ 게임에 참가하고 있던 모든 유저들이 로그아웃하면서 ‘너브’는 무너지는데, 이 또한 블록체인의 원리와 같다. 블록체인도 참여자(노드)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 네트워크가 기능을 멈춘다. 영화에서 유저들의 익명성 보장은 ‘너브’ 게임을 지탱하고 작동하게 만드는 주춧돌 같은 것인데, 익명성이야말로 분산성, 확장성 등과 함께 블록체인을 규정짓는 핵심적 특징이기도 하다. 미션수행에 대한 보상이 비트코인 등의 가상화폐가 아닌 달러로 지급된다는 점만 제외하면, ‘너브’ 게임의 많은 부분이 블록체인의 원리와 놀랍도록 유사한 셈이다.

영화 〈너브〉가 그리는 것이 오랜 세월 동안 중앙에 과도하게 집중돼 왔던 권력을 사용자 개개인들에게 돌려준다는, 혁명적 개념의 블록체인이 지향하고 바꿔 놓을 세상 아니겠는가.

2019-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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